97. 平壤妓生何所能
林進士는 乙密臺에서의 회갑잔치가 끝난 후에도 김삿갓을 놓아주지 않았다. 평양에 머무는 동안 몇 달이라도 좋으니 자기 집에 있으라면서 詩文에 능한 기생을 데려다가 명승고적들을 안내케 하고, 불편함이 없도록 그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어제까지 토굴 잠을 자면서 끼니를 걱정하던 그는 하루아침에 평양기생의 수발을 받는 한량이 된 것이다.
20이 갓 넘어 보이는 竹香은 평양의 기생세계에서 20이 넘으면 老妓라면서 겸손해하지만 詩書歌舞가 모두 능한 재기 넘치는 활달한 名妓였다. 김삿갓은 그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練光亭을 비롯하여 浮碧樓, 望月樓, 風月樓, 詠歸樓, 涵碧亭, 快哉亭, 永明寺, 長慶寺 등등, 평양에서 이름난 명소는 하나도 빼지 않고 모두 돌아보았다.
어느 날 練光亭에 올라 술이 거나해진 김삿갓은 죽향에게 “평양기생은 무엇을 잘 하느냐? (平壤妓生何所能)”고 물었더니 죽향은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시도 또한 잘 한다.(歌能舞能詩亦能)”고 거침없이 대답한다.
장난기가 발동한 김삿갓은 눈 딱 감고 “잘한다잘한다 하는데 그중에 특별히 잘하는 것은 무어냐?(能能其中別何能)”고 또 물었다. 죽향이 얼굴을 잠시 붉히더니 “달밤 삼경에 사나이 다루는 것을 잘한다.(月夜三更弄夫能)”고 대답한다. 김삿갓이 무릎을 치면서 너털웃음을 웃고, 그것은 차차 확인이 될 터이지만 먼저 시를 한수지어보라고 했다. 죽향은 江村暮景이라는 제목의 시를 다음과 같이 읊는다.
실버들 천만가지 문 앞에 휘늘어져
구름인양 눈을 가려 마을을 볼 수 없네.
목동의 피리소리 그윽이 들리는데
부슬비 내리는 강에 날이 저문다.
千絲萬縷柳垂門
綠暗如雲不見村
忽有牧童吹笛過
一江烟雨白黃昏
김삿갓은 두번 세번 감격스럽게 읊어 보면서 누구의 시냐고 물었다. 정자 위에 걸려있는 어느 시보다도 멋진 이 시가 한낮 기생의 자작 시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김삿갓이었다. 죽향은 못내 서운한 듯, 묵묵히 머리를 수그리고 있다가 김삿갓이 재차 누구의 시냐고 채근하자 "제 비록 기생일망정 남의 시를 표절할 만큼 천박하지는 안사옵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
화들짝 놀라 술이 말끔히 깬 김삿갓은 다시 한 번 시를 읊어 보고 "과연 평양기생이로구나" 생각하면서
죽향에게 정중히 거듭 사과한 후에 어색한 분위기를 얼버무리기 위하여 똑 같은 門, 村, 昏 석 자의 운자를 써서 연광정이라는 즉흥시 두 연을 연거푸 읊었다.
깎아지른 절벽 위엔 높은 문이 서 있고
만경창파 대동강엔 푸른 물결 굽이친다.
지나가는 봄 나그네 말술에 취했는데
천만가닥 실버들 십리 강촌에 늘어졌구나.
截然乎屹立高門
萬頃蒼波直碧翻
一斗酒三春過客
千絲柳十里江村
외로운 따오기는 노을 빛 끼고 돌아오고
짝지은 갈매기 눈발처럼 휘 나른다.
물결 위에 정자 있고 정자 위에 내가 있어
초저녁에 앉았는데 밤이 깊자 달이 뜨네.
孤丹鷺帶來霞色
雙白鷗飛去雪痕
波上之亭亭上我
坐初更夜月黃昏
연광정 위에서 저물어 가는 대동강 풍경을 바라보며 죽향의 시에 화답한 시였다.
김삿갓의 시를 몇 번이고 거듭 읊어 본 죽향은 어느새 시에 취한 듯 그늘졌던 낯빛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기쁨이 넘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활짝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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