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강계미인 추월이
조선의 북단, 압록강 상류의 禿魯江에 접한 江界고을은 무척 추운 지방이면서도 미인이 많기로 이름난 곳이다.
어느 날 한 정자에 올랐더니 옷매무새로 보아 기생이 틀림없는데도 시를 제법 아는 듯 정자에 걸려 있는 시들을 차례로 돌아보며
속으로 음미하는 여인이 있었다.
잠시 후 여인은 내려가고 동자에게 물으니 과연 그는 詩書와 歌舞에 모두 능한 강계에서도 일등 가는 기생 秋月이라 했다.
김삿갓은 장난기가 동하여 동자에게 '내 편지를 써 줄 것이니 가져다주고 답장을 받아 오라' 고 했다.
동자는 빙긋이 웃으면서 편지를 받아 들고 내려가더니 얼마 후에 답장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김삿갓이 보낸 편지에는 단지 <榴>자 한 자가 써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뜻을 모를 추월이 아니었다.
그것은 옛날 송도기생 黃眞伊에게 당시의 거유, 蘇世讓이 보낸 편지였고, 황진이는 <漁>자 한 자를 써서 답함으로서 바로 意氣投合하여
당시는 몰론, 먼 후일까지도 온 나라에 짙은 염문을 뿌린 사랑의 일화이다.
그 뜻은 이러하다. 榴자는 '석유나무유' 자이니 이를 한문으로 碩儒那無遊 라고 쓰면 ‘큰선비와 어찌 함께 놀지 않으려느냐.’ 라는 뜻이 되니
소세양이 황진이에게 프러포즈를 한 것이고, 漁자는 '고기잡을어' 자이니 그 발음대로 한자로 高妓自不語라고 쓰면 ‘품위 있는 기생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라는 뜻이니 황진이의 완곡한 수락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추월에게서 김삿갓에게 온 답장은 그게 아니었다. <榴字書翰則 巨儒蘇世讓之書也 勿爲剽竊> 이라고 써 있지 않는가.
‘榴자 편지는 소세양이 썼던 편지이니 남의 글을 함부로 표절하지 말라.’는 뜻이 아닌가.
김삿갓이 추월을 한낱 기생으로 보고 희롱을 했다가 되게 얻어맞은 셈이었다.
내가 실수를 했구나 하고 너털웃음을 웃고 잊으려 했다. 그리하여 奉香山의 法藏寺, 白雲山의 英覺寺, 善住山의 深原寺 등등을 구경하면서
달포가 지난 어느 날 김삿갓이 묵고 있는 객줏집으로 추월이 찾아왔다.
추월도 김삿갓의 편지를 받은 날 부질없는 선비의 장난으로 치부하고 잊고 있었는데 심원사의 노스님을 찾아갔다가
‘그분이 바로 유명한 방랑시인 김삿갓이라’는 말씀을 듣고 놀라 용서를 빌고자 온 강계 고을의 객줏집을 모두 수소문하여 찾아왔노라고 했다.
그러면 이제라도 답장을 다시 써 주겠느냐고 김삿갓이 짐짓 농을 거니 추월이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漁자를 써 올린다.
그렇게 해서 김삿갓은 거처를 추월의 집으로 옮겼는데 방으로 들어가 보니 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한 폭 걸려 있었다.
인간의 부귀영화 탐내지 말고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노닐어 보세.
정든 님 모시고 호젓한 오두막에서
가을바람 밝은 달과 함께 늙어나지고.
富貴功名可且休
有山有水足遨遊
與君共臥一間屋
秋風明月成白頭
김삿갓이 시를 읽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는 朝雲이라는 기생이 南止亭에게 보낸 시가 아니냐고 물으니, 추월이 그렇다면서 자기는 이 시를 하도 좋아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외워보고 혼자 즐거워한다고 했다. 이런 시를 좋아한다면 그도 산수를 퍽 좋아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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