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天長去無執
「關北千里」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安邊 釋王寺는 李太祖의 건국설화가 서려 있는 명소요, 吉州, 明川은 수많은 고관대작들이 유배를 갔던 역사의 고장이 아니던가. 그러나 당장 시급한 문제는 우선 오늘밤 잠자리였다.
佛影庵에 유숙할 때는 잠자리 걱정도, 끼니 걱정도 없었다. 그러나 空虛스님과 헤어진 오늘부터는 모든 것을 그날그날의 운수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날은 저문 데 깊은 산속에 오막살이 한 채가 나온다. 사립문도 없는 단칸 斗屋이다.
다행이 혼자 사는 노파가 반갑게 맞아 주면서 화로에 불을 피워 들여오고, 저녁 걱정을 하며 부엌으로 나간다. 방안을 둘러보니 천장에는 거미줄이 잔뜩 쳐져 있고, 화로에서는 겻불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김삿갓은 여기에서 또 戱詩 한 수를 읊는다.
하늘은 높아 잡을 수 없고
꽃은 늙어 나비가 오지 않네.
天長去無執(천장거미집)
花老蝶不來(화로겻불내)
천장의 거미줄과 화로의 겻불 냄새를 비슷한 한문글자에 맞춰 보니 제법 그럴듯한 시가 되었다. 그래서 혼자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노파가 소반에 국수 한 사발과 지령(간장) 반 종지를 놓아 가지고 들어와서 먹기를 권한다. 김삿갓의 장난기 어린 詩才가 다시 이어진다.
국화꽃이 찬 모래 밭에 피어
그림자가 연못에 반쯤 비치네.
菊樹寒沙發(국수한사발)
枝影半從池(지령반종지)
국수를 먹고 나니 노파는 산 너머 김부잣집에서 잔치음식을 가져왔다면서 소반 위에 귀한 음식을 담아 내온다. 소반에는 강정, 빙사과(油蜜菓), 대추, 복숭아 등이 놓여 있다. 음식 이름을 그대로 주워 맞추니 또 한 수의 시가 된다.
가난한 선비가 정자 옆을 지나다가
술에 취하여 소나무 아래 엎드렸소.
江亭貧士過(강정빙사과)
大醉伏松下(대추복숭아)
음식을 먹고 나자 노파는 개를 불러 과줄 부스러기를 던져 주었다. 개는 지금까지 뒷간에서 똥이라도 먹다 왔는지 몸에서 구린내가 풍겨 오고 있었다. 김삿갓은 이를 바라보다가 또 한 수의 희시를 생각해 냈다.
달이 옮겨 가니 산 그림자 바뀌고
사람은 장거리에서 돈을 벌어 오네.
月移山影改(월이사냥개)
通市求利來(통쉬구린내)
통쉬란 뒷간의 사투리이다. 아무튼 그처럼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모두 시로 바꾸어 놓고 보니 보고 느끼는 것이 그렇게도 즐거울 수가 없었다. 세상이란 본시 각박하기 짝이 없는 것이 아닌가. 이론에 치우치면 모가 생기고, 정에 약하면 흘러가 버리고, 고집이 세면 살기가 거북스러운 것이다. --계속--
'김삿갓'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삿갓(32) 試問何人始起樓 (0) | 2016.08.16 |
---|---|
김삿갓(31) 終日綠溪不見人 (0) | 2016.08.16 |
김삿갓(29) 沙白鷗白兩白白 (0) | 2016.08.16 |
김삿갓(28) 浪客去兮不復還 (0) | 2016.08.16 |
김삿갓(27) 若捨金剛景 (0) | 2016.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