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王昭君의 고운 벼도 胡地의 흙이 되고
김삿갓이 원주를 거처 한양으로 가려고 얼마를 가다가 날이 저물어 길가의 주막에 들렀다. 목은 컬컬하지만 囊中에 無一分이라 술을 청할 생각도 못하고 서산에 기우러지는 석양노을을 바라보며 술청에 걸터앉아 옛 시 한 수를 읊조리고 있었다.
저만치에서 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주모가 슬며시 다가오더니「손님은 시를 좋아하시나 보죠. 혹시 시인이 아니세요?」하고 묻는다. 김삿갓은 주모의 질문에 적이 놀라면서 주모는 시를 아는가 하고 물었다.
“齋狗三年能風月(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한다)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술장사를 하기 전에 10년 가까이 서당지기로 있었기 때문에 어깨너머로 좀 배웠습니다마는 읽기는 해도 쓸 줄은 모르는 감투글 이랍니다.”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옛날부터 서당에서는 글을 읽을 줄은 알아도 쓸 줄은 모르는 사람을 '감투글'이라고 일러왔다. 주모는 그런 속어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5년 전에 남편이 죽자 서당에서도 나와야 했고, 할 수 없이 호구지책으로 여기에서 술장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옛 친구라도 만난 듯,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돈이 없는데 하룻밤 자구 갈 수 있겠느냐' 고 어렵게 물었다. 주모는 돈이 대수냐는 듯이 미소를 짓더니 주방으로 들어가 우선 술상 보아 오고 이어서 저녁을 지어 내왔다. 밤늦도록 술을 마시며 시 이야기, 세상 이야기를 나누다가 각각 잠자리에 들었다.
밤이 깊어 오자 베갯머리에서는 귀뚜라미 소리가 소란하고, 창호지에는 달빛이 서릿발처럼 차갑게 비쳐 와서 암만해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김삿갓은 오랫동안 輾轉反側하다가 마침내 등잔불을 켜 놓고 다음과 같은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나그네는 시름에 겨워 잠 못 이루는데
서리 찬 달빛은 나를 비쳐 주고 있네.
푸른 대 푸른 솔은 천고의 절개지만
붉은 복사 흰 배꽃은 잠시 피었다 지는 것을--
客愁蕭條夢不仁
高天霜月照吾隣
綠竹蒼松千古節
紅桃白梨片時春
왕소군의 고운 벼도 호지의 흙이 되고
양귀비의 예쁜 얼굴 마외파의 티끌일네.
세상 사물의 이치가 모두 그러하거늘
오늘 밤 그대 옷 벗기를 아끼지 마오.
昭君玉骨胡地土
貴姬花容馬嵬塵 (馬嵬坡; 양귀비가 참수된 곳)
世間物理皆如此
莫惜今宵解汝身
王昭君이나 楊貴妃 같은 천하의 절세미인들도 한번 죽고 나면 모두가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데, 젊은 나이에 무엇 때문에 절개를 지키려고 애쓰느냐고 하는 노골적인 유혹의 시였다. 안방에 대고 물 한 그릇 달라고 청하여 주모를 부른 후에 말없이 시를 적은 종이를 건네고 하회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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