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벽제관을 지나 임진포로
말을 빌려 탔던 아이에게서 조금만 더 가면 碧蹄館이라는 말을 들은 김삿갓은 불현듯 임진왜란의 고사가 머리에 떠올랐다. 宣祖는 의주까지 피난하면서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였고, 구원병을 몰고 온 李如松은 평양과 송도를 차례로 탈환했으나 벽제에서 패하였다.
승승장구하던 이여송이 벽제에서 혼이 나자 송도로 물러나서 좀처럼 싸우려 하지 않았다. 지혜롭기로 유명했던 漢陰 李德馨이 여러 차례 나가 싸우기를 권유하다가 화가 나서 이여송의 방에 둘려 있는 赤壁圖 병풍에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써 갈겼다.
승부란 한 판의 바둑과 같은 것
병가에서 가장 꺼림은 꾸물거림이오.
알건대 적벽싸움의 전에 없던 공적은
손 장군이 책상을 찍던 그 때부터요.
勝負分明一局碁
兵家最忌是遲疑
須知赤壁無前績
只在將軍斫案時
삼국지에 나오는 고사를 빗대어 지은 시였다. 孫權이 曹操에게 패하여 장병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자 모두들 항복하자고 하였으나 周瑜와 魯肅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고 이에 용기를 얻은 손권이 분연히 일어나 책상을 칼로 찍으면서 결전을 선언함으로서 赤壁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이여송은 이 시를 읽고 크게 깨달은 바 있어 陸戰을 재개하여 서울을 탈환하였고, 멀리 남해에서는 이순신장군이 적의 함대를 섬멸함으로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으니 이덕형의 이 한 편의 시가 그토록 위대한 공헌을 한 셈이었다.
그러저러한 回憶에 잠기면서 벽제관에서 일박한 김삿갓은 임진나루를 향하여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저만큼 산기슭에서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는가. 눈을 들어 살펴보니 소복을 한 젊은 아낙이 한 무덤 앞에서 곡을 하고 있는데 때가 봄인 탓인지 그 울음소리가 마치 노래처럼 구성지게 들려 왔다.
십리 모래밭 가 언덕은 잔디인데
소복 입은 과부의 곡소리 노래 같이 들리네.
가엽다 지금 무덤 앞에 부어 놓은 저 술은
낭군이 지어 놓은 곡식으로 빚은 술이리.
十里平沙岸山莎
素衣靑女哭如歌
可憐今日墳前酒
釀道阿郞手種禾
여인의 곡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즉석에서 읊은 즉흥시이다.
남편이 지어 놓은 곡식으로 다정한 밥상을 같이 하지 못하고 술을 빚어 무덤에 뿌려야 할 줄을 누가 알았으랴.
인생의 生老病死가 하도 허무하게 느껴져서 읊은 시었다.
'김삿갓'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삿갓(79) 黃眞伊 무덤은 찾을 길 없고 (0) | 2016.08.23 |
---|---|
김삿갓(78) 黃眞伊 묻혔다는 長湍고을 (0) | 2016.08.23 |
김삿갓(76) 馬上逢寒食 (0) | 2016.08.23 |
김삿갓(74) 毋岳재의 봄 (0) | 2016.08.23 |
김삿갓(73) 치욕의 남한산성 (0) | 2016.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