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김삿갓(73) 치욕의 남한산성

수돌이. 2016. 8. 23. 15:51

73. 치욕의 남한산성


김삿갓은 三田渡에서 청태종 공덕비를 보는 순간 병자호란의 치욕이 번개처럼 머리를 때렸다. 우리의 임금 인조가 세자와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소위 受降壇이라는 높은 단 위에 오만하게 앉아 내려다보는 저 북녘 오랑캐 청태종에게 三跪九叩頭를 했던 바로 그 자리가 아니던가.


항복을 받은 후에 그들은 왕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하고 무고한 백성을 50만 명이나 포로라는 이름으로 잡아가면서도 皇恩이 망극함을 감사하라면서 항복을 받았던 그 자리에 소위 <大淸皇帝功德碑>를 세우라고 하여 온 조정과 백성이 울면서 세운 그 비석이다.


먼저 비문의 초안을 써 받치라고 해서 張維등 대신들에게 쓰게 하여 瀋陽에 보냈으나 그것으로는 미흡하다 하여 다시 써 보내게 되었고, 그 때 仁祖는 문장력이 좋은 李景奭(호: 白軒 당시 부제학)에게 명하여 부득이 본의 아니게 치욕의 글을 천추에 남긴 이경석은 한 평생 글 배운 것을 한탄했다고 한다.


글 배운 것을 한탄하기로 하면 김삿갓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글자주가 아니었던들 영월백일장에서 자기 할아버지를 매도하는 글로 장원급제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저러한 생각을 하면서 남한산성 문루에 올라서서 사방을 둘러보다가 문득杜甫의 시를 연상하였다.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남아 있어

봄이 오니 산성에 초목이 무성하구나.

느끼는 바 있어 꽃에 눈물 뿌리고

이별이 한스러워 새소리에 놀라노라.

國破山河在

春城草木深

感時花濺淚

恨別鳥驚心


나라가 망한다는 것처럼 슬픈 일이 없다. 그는 이곳에서 병자호란의 치욕적인 역사를 새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국호를 淸이라 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 청태종은 인조 14년(1636, 병자년)에 십만대군을 이끌고 12월 2일 심양을 출발하여 14일에는 개성을 점령하고 16일에는 선봉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기 시작했으니 불과 두 이레만의 일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지 불과 40년이요, 10년 전 정묘호란 때도 왕이 강화도까지 蒙塵하는 곤욕을 치르면서 저들과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지 않았던가. 그 동안 전쟁위협을 수 없이 받았고 그들의 침공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는데 朝野는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당시 남한산성에는 13,000 명의 군사와 50일분의 식량이 있었다. 명나라에 急使를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고 8도에 勤王兵(임금에게 충성을 받치는 군사)을 모집하는 격문을 붙였으나, 제 코가 석자나 빠진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낼 리 없었고 적의 포위망을 뚫고 달려오는 용맹한 근왕병도 없었다.


45일이 지나면서 성 안에서는 현실을 직시하고 항복하자는 主和論과 다 함께 죽을지언정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斥和論이 대립하여 입씨름만 하고 있을 뿐, 10만대군의 포위 속에 고립된 조정은 속수무책이었다. 생각이 이에 미친 김삿갓은 한숨을 푸-푸- 쉬면서 무거운 발 거름으로 산성을 돌아보았다.


김삿갓이 오늘의 우리현실을 보았으면 무어라고 했을까. 전쟁위협은 그 때와 다를 바 없는데 한미공조냐 민족공조냐 하고 공론만 분분한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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