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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감의 여류시인 김삼의당(金三宜堂)

수돌이. 2020. 3. 10. 16:53
다감의 여류시인 김삼의당(金三宜堂)
조선시대에서 여성으로서 문학을 한 사람을  들라면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 같은 사대부가의 부인들이거나 황진이, 이매창, 홍랑,김부용 같은 기생들이었다. 그러나 평민신분의 부부가 애절한 정과 농촌의 어려운 가정생활, 규방 안의 예절과  남원의 풍치를 주옥같은 언어로 표현시로 남긴 인물이 있었다.


남원의 김삼의당(金三宜堂.1769~1823)이다.여염(閭閻)집의 평범한 부인으로 문학 작품을 창작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든 인물중에 한사람이였다. 그의 시는 이랬다.

달 하나 두 곳을 비춰주건만  / 두 사람 천리를 떨어져 있네
청산에 바라건대 이 달빛 따라 / 밤마다 밤마다 그대 곁을 비추었으면
一月兩地照 二人千里隔 願隨此月影 夜夜照君側 ……

당시 시대상황으로 문학이란 자유롭고 여유가 있는 생활 속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조선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문학을 하기에는 너무나 불리한 조건이였을 것이다. 더구나 여염집 여인으로서 문학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김삼의당(金三宜堂)은 남원이 낳은 여류시인으로 궁색한 살림을 꾸리며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전원의 풍치를 생애(1769년∼1823년)를 통해 우리 역사상, 여성으로서 가장 많은, 257 편의 한시와 산문으로  다정다감한 아름다운 글로 남겨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나 전라북도는 고래로 이름난 여성 문인이 여럿 배출된 지역으로, 백제 시대에는 '정읍사'로 유명하고, 조선조에서는 부안에서 이매창이 기녀문학을 일으키였으며, 조선조 후기에는 남원의 가정 주부로서 '삼의당 김씨'가 있는가 하면, 특히 언니가 시집갈 때 쓴 것으로 추정되는 <送兄于歸(송형우귀)>등 세 편이 있고, 근년에는 혼불로 이름 높았던 '최명희' 소설가가 있다.

또한 전주의 기생의 시와 남원 광한루에 현판에는 기생 연옥(蓮玉)과 봉선(鳳仙)의 시가 사대부들의 글과 같이 현액되어 걸려져 있어 전라북도에서의 여성들의 문학활동이 원활했던 근거들을 찾을 수가 있다.

그는 
남편과 주고받은 시를 통해서 몰락한 사대부 집안임을 알 수 있다. 한 집안의 며느리로서, 한 남자의 부인으로서 가정에 묻혀 살았던 여인이기에 그의 생애와 시상(詩想)을 아는 사람은 흔하지 않으며, 이름마저 남기지 않고 당호(堂號)로만 전해 시대적인 상황에 가슴을 여미게 한다.. 

그녀의 작품은 본대로 느낀 대로 쓴 서정시 가 많다. 촌행즉사2(村行卽事2)-고을로 가면서 본대로-라는 제목의 시에서는
푸른 이끼 낀 묵은 길 미끄러워/비껴서 딴 길로 돌아간다
쓸쓸하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 꽃나무 아래 싸리문 보이는구나
古逕蒼苔滑 斜從別路歸 寥寥聞犬吠 花下有柴扉

하일(夏日) -여름날-에서는 이렇게 노래했다.
창밖에 낮은 길고 향기로운 바람 이는데/ 어찌하여 석류화는 하나하나 붉게 익는가
문 앞으로 기와조각 돌조각을 던지지 말라/푸른 그늘 속에는 꾀꼬리가 있단다
日長窓外有薰風 安石榴花個個紅 莫向門前投瓦石 黃鳥只在綠陰中

또한 삼의당은 자신이 남원에서 나고 자란 것을 자랑으로 여겼으며, 남원의 인심과 산수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도 깊이 인식한 분이다. 그런 점에서 삼의당은 진정으로 남원에서 자랑스런 인물로 추앙하고 있다.
촌행즉사1(村行卽事1) '고을로 가면서 본대로'에서는
고목에 단풍잎 지고/외로운 고을에 오막살이 몇 채
산속 닭은 두세 번 우는데/적막쿠나, 이 누구의 집들인가
古木黃葉脫 孤村白屋疏 山鷄兩三唱 寥落是誰居

삼의당의 생애와 작품세계


삼의당(三宜堂) 김씨는 조선조 영조 45년인 1769년 10월 13일에 남원의 서봉방(棲鳳坊:에서 태어났다.  연산군 때 학자인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11대 후손인 김인혁(金仁赫)의 딸이다

여성에게는 이름 밝히기를 꺼려하던 당시의 관습에 따라 본명은 알려지지 않고 당호(堂號)로만 전해져 오고 있는데, 율곡의 어머니인 신사임당 같은 분도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볼 때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녀의 나이 18세에 같은 마을에서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난 담락당(湛樂堂) 하립과 결혼했다. 하립은 진주 하씨(晋州河氏)로 세종조 영의정을 지낸 하연(河演)의 12대 손이다.  생애와 작품세계를 살펴보면 친가 규수시절(1769년 출생에서 1786년 결혼까지)와 남원 시가시절(1786년 결혼부터 1801년 진안 이거시절까지) 그리고 진안 정착시절(1801년 진안 정착부터 1823년 죽음까지)로 나눌 수 있다.
 
친가(親家) 규수(閨秀)시절

삼의당의 친정집은  최소한의 글공부는 가르치는 남원의 한 빈곤한 농가였던 것 같다. 삼의당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일찌기 한글로 된 소학을 읽고 문자를 배워 제자백가를 대충 섭렵했다'는 삼의당 김부인 유고(三宜堂 金夫人 遺稿)의 자서(自序)를 통해서 보면 그 집안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일설에는 그녀는 서당의 담벼락에 몰래 붙어서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문자를 터득했다고 한다. 이러한 가정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삼의당은 스스로 글공부에 힘을 기울여 혼인하기 전에 이미 규방의 법도를 바르게 익혀 부덕을 고루 갖추었고 작품에서 보면 문학에도 상당한 재능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유추가 가능하다.

 十三顔如花(십삼안여화)- 열 세 살 얼굴은 꽃과 같고,十五語如絲(십오어여사)- 열 다섯 살 말솜씨는 실타래 같네.內則從姆聽(내칙종모청)- 내칙 편은 이모 님께 들었고,新粧學母爲(신장학모의)- 치장하는 법 어머님께 배웠네.
김삼의당(金三宜堂.)의 성품을 잘 나타내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