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스크랩] 손자병법 36계...

수돌이. 2017. 6. 13. 18:10

손무와 손빈의 손자병법 36계(計).. 



1. 승전계 (勝戰計) 아군의 형세가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을 때 말을 타고 적을 압도하는 작전을 말한다.



1-1, 제1계 만천과해(瞞天過海) : 하늘을 가리고 바다를 건넌다.


"자신의 계획을 노출시키지 않고 일을 진행시킨다"는 의미다. 스스로의 방비가 완벽하다고 적을 깔보는 것은 패전의 지름길이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 평상시 습관처럼 혹은 풍경처럼 보이면 의심을 품지 않는다."



예문 1>


북해 태수 공융(孔融)이 황건적으로 포위되었을 때..


'태사자(太史慈)'는 포위망을 돌파하여 원병을 청하러 가야하는 사명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 성을 중심으로 황건적으로 포위를 당해 '태사자'는 임무를 수행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활과 과녁을 두 병사에게 들리고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성안에 있는 군사나 성 밖에 있는 적병들이 이를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그러나 '태사자'는 태연히 말을 끌고 성 가까이에 있는 언덕에 과녁을 세우고 활쏘기 연습을 시작했다. 이윽고 연습이 끝나자 그는 다시 성안으로 돌아왔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이렇게 활쏘기 연습을 거듭했다.


그러자 성밖에 있는 적병들 중에는 그것을 구경하는 자도 있고, 드러누워 낮잠을 자는 자도 있었다. 사흘, 나흘 그는 변함없이 이렇게 활쏘기를 계속하자, 적은 이제 그에게 아무런 관심조차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때를 틈타 '태사자'는 갑자기 말 위에 올라 채찍을 휘두르며 비호처럼 적의 포위망을 뚫었다.


적들은 '아차~~ 속았구나' 하고 손을 쓰려 했을 때 그는 이미 멀리 가버린 후였다. 이에 '태사자'는 말을 채찍질하여 황건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게 된다. 삼십육계 원문에는 '만천과해'에 대한 짤막한 해설이 붙어 있다.


"아군의 수비가 안전하다고 생각되면 자칫 경계심이 흐트러지기 쉽다. 또한 사람은 흔히 보아온 것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지 않게 된다. 그러한 약점에 계략을 찔러 넣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허점을 찌르는 계략은 대수롭지 않게 눈에 뜨이는 곳에 깃들게 하는 것이다. 꼭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備周則意怠,常見則不疑.陰在陽之內,不在陽之對.太陽,太陰.]"


...간단히 말하자면 위의 ‘태사자’와 같이 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적을 방심하게 하고, 그것에 적이 익숙해졌을 때, 그 틈을 찌르는 계략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만천과해(瞞天過海)'는 어디까지나 '승전계(勝戰計)'에 속하는 계략이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아군이 '우세할 때' 쓰는 계략이라는 것이다. ‘태사자’가 적의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것을 '승리'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그 이후에 ‘태사자’가 ‘유비’를 불러와서 ‘관우’가 황건적 도당의 두목인 ‘관해’의 목을 쳐서 ‘공융’이 구원을 받게 되니, 결과적으로는 승리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에 지나지 않는다. 단순히 '태사자가 적의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것' 그 자체로는 결코 '승리'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만천과해'에 '태사자'의 예를 드는 것은 '적을 방심하게 하고 그 틈을 찌른다'는 점에서는 타당하지만, 그보다 이전의 '승전계'라는 전제를 만족시키지 못하므로 잘못된 예라 할 것이다.


그럼 '만천과해'의 예로는 어떤 것을 들 수 있을까. 위의 ‘태사자’의 예처럼 대부분이 부분만을 충족시키는 예가 많아서 적절한 예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어쨌거나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예는 전국시대 초기 때 이야기이다.



예문2>


‘魏 文侯(위문후)’가 중산국(中山國)을 정벌하기 위해 元帥(원수)로 삼은 '악양(樂羊)'의 사례이다.


...위(魏)나라는 晉(진)나라가 나뉜 삼국(위, 조, 한 - 魏, 趙, 韓) 중의 하나이다. 이때 진(晉)의 북동쪽에 중산국(中山國)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는 진(晉)나라에 계속 조공을 바치고 있었는데 진(晉)이 삼국으로 나뉜 후로는 어느 나라를 섬겨야 할지 몰라서 아무 곳에도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중산국의 위치는 서쪽의 조나라와 가깝고 남쪽의 위나라와는 꽤 먼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나라가 중산국을 차지하면 위나라는 북쪽으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을 것이 뻔했다.


중산국(中山國)을 치기로 마음먹은 ‘위 문후(魏文侯)’는 누구를 원수로 삼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 때, ‘책황(翟璜)이 ‘악양(樂羊)’을 천거한다. 하지만 다른 신하들은 ‘악양(樂羊)’의 아들인 ‘악서(樂舒)’가 중산국(中山國)에서 벼슬을 삼고 있다는 이유로 ‘악양(樂羊)’을 원수로 삼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위 문후(魏文侯)’가 ‘악양(樂羊)’을 불러 물어보니, ‘악양(樂羊)’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어찌 공사(公事)를 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한다. 이에 ‘위 문후(魏文侯)’는 ‘악양(樂羊)’을 원수로 삼아 중산국(中山國)을 치게 한다.


‘악양(樂羊)’의 병법은 탁월하여 중산국(中山國)의 병사들을 계속 이겨나가, 마침내 중산국(中山國)의 수도인 중산성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중산국(中山國)의 임금인 ‘희굴(姬窟)은 ‘악양(樂羊)’의 아들인 ‘악서(樂舒)’를 내세워서 '항복하기 위해서는 임금과 신하가 상의할 시간이 필요하니 한 달간의 말미를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악양(樂羊)’이 승낙하자 ‘희굴(姬窟)’은 ‘악양(樂羊)’이 아들인 ‘악서(樂舒)’의 처지를 걱정하여 공격을 미루는 것으로 생각했다.


한 달이 지나도 뾰족한 계책이 서지 않자 ‘희굴(姬窟)’은 또 ‘악서(樂舒)’를 보내 다시 한 달의 여유를 얻어낸다. 이렇게 ‘악양(樂羊)’은 ‘악서(樂舒)’에게 아예 넉넉하게 세 달의 여유를 주었다.


그러자 중산국(中山國)은 물론 위(魏)나라의 병사들까지도 '악양(樂羊)은 아들을 걱정하여 중산국(中山國)을 치지 않을 것이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또한 위(魏)나라 조정에서는 ‘악양(樂羊)’을 시기하는 대신들이 ‘위 문후(魏文侯)’에게 ‘악양(樂羊)’을 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 문후(魏文侯)’는 ‘악양(樂羊)’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때때로 사자를 보내 ‘악양(樂羊)’을 위로하고, ‘악양(樂羊)’이 돌아오면 하사하기 위하여 도성 안에 좋은 집까지 마련해 두었다.


한 편, ‘악양(樂羊)’은 약속한 3개월이 지나도 중산국(中山國)이 항복을 하지 않자 병사들에게 총공격을 준비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병사들은 또다시 한 달의 여유를 줄 것이 뻔 한데 뭐 하러 준비를 하느냐며 불만을 터뜨린다.


그러자 ‘악양(樂羊)’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중산국(中山國)을 치러 온 것은 그 임금이 무도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중산국(中山國)을 우리 ‘위(魏)나라’에 영원히 편입시켜야 한다. 우리가 처음에 힘으로 중산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나, 그렇게 하면 백성들은 상처를 입고 우리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산국(中山國)은 결코 ‘위(魏)나라’ 땅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기다려 온 것은 백성들을 구하고 그들을 위(魏)나라의 백성으로 삼기 위함인 것이다."


사태가 급해진 중산국(中山國)에서는 ‘악서(樂舒)’를 인질로 삼으려 하나, ‘악양(樂羊)’은 아들인 악서(樂舒)에게 도려 이렇게 말한다.


"너는 참으로 불초한 자식이다. 벼슬을 살면서도 그 나라를 위해 계책을 세우지 못했고, 적과 싸워 이기지도 못했으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또 나라가 망하게 되었으면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화평을 청하도록 권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해야 하거늘, 그런 것도 못하고 부끄럽지 않느냐! 네놈의 몸뚱아리는 본디 내가 만들었으니으니 거두어 가는 것도 내가 하겠다!"


‘악양(樂羊)’은 이렇게 말하며 스스로 활을 들어 ‘악서(樂舒)’를 쏘려 했다. 그러자 ‘악서(樂舒)’는 황급히 숨어 들어갔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희굴(姬窟)’은 ‘악서(樂舒)’를 죽여 그 시체로 국을 끓여 ‘악양(樂羊)’에게 보낸다. ‘악양(樂羊)’이 충격을 받은 틈을 타서 공격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악양(樂羊)’은 오히려 ‘악서(樂舒)’의 머리를 보고 꾸짖으며 국을 다 먹었다. 그러고는 중산국(中山國)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당시 전쟁에 패한 장군은 당연히 죽여 머리는 베고, 몸은 탕(湯)이나, 젖갈을 담궈 먹었다. 일반적인 일이었다.


"너희 임금이 국을 보내주어 잘 먹었다. 중산성을 함락하는 즉시 내 너희 임금에게 직접 감사하리라. 너는 임금에게 돌아가 우리 군중에도 국을 끓이는 가마솥이 있음을 알려라!"


이후 ‘악양(樂羊)’은 중산국을 완전히 점령한다. 나라를 잃은 중산국 임금 ‘희굴’은 자살한다.


‘악양(樂羊)’이 개선해 돌아오자 ‘위 문후(魏文侯)’는 ‘악양(樂羊)’에게 영지와 커다란 상자를 준다. 상자에 보물이 들어있을 것으로 생각한 ‘악양(樂羊)’은 그 상자를 열어보고 깜짝 놀란다. 그 상자에는 보물이 아니라 그 동안 대신들이 ‘악양(樂羊)’을 참소하자고 올린 참소문 들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이에 ‘악양(樂羊)’은 자신이 공을 세운 것은 ‘위 문후(魏文侯)’가 자신을 끝까지 믿어주었기 때문인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후에 ‘위 문후(魏文侯)’에게서 진짜 보물이 도착하고, ‘악양(樂羊)’은 자신의 영지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악양(樂羊)’이 병권을 두고 영지로 떠나자 그를 천거했던 ‘책황(翟璜)’이 ‘위 문후(魏文侯)’에게 묻는다.


"악양(樂羊)이 위대한 장수란 것을 아시면서도 어찌 물러나게 하셨습니까? 그에게 군사를 맡기면 우리나라의 방비는 튼튼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위 문후(魏文侯)’는 미소를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책황(翟璜)’은 궁에서 나오다가 ‘이극(李克)’을 만나 ‘위 문후(魏文侯)’에게 얘기했던 것을 얘기한다. ‘이극(李克)’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악양(樂羊)은 자기 자식조차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오. 자기 자식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하물며 타인에게는 어찌 하겠소?"라고..



★. <십팔사략(十八史略)>에 보면 춘추전국시대 위(魏)나라 신하 이극(李克)의 인재를 선발하는 다섯 가지 관찰법을 기록해 두었다. 일명 사람을 알아보는 이극(李克)의 오시법(五視法)이다.


위나라 문후(文侯)는 이극(李克)에게 이렇게 물었다.

 

전에 선생은 "집안이 가난해지면 어진 부인이 필요하고(가빈즉사양처-家貧則思良妻), 나라가 혼란해지면 유능한 재상이 필요하다(국란즉사양신-國亂則思良相)"고 하였소. 지금 나라의 재상을 선발하려 하는데 어떤 사람을 재상으로 등용했으면 좋겠소?” 


문후의 물음에 이극은 이 ‘오시법(五視法)’을 제시하며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간언했다.

 

1. 거시기소친(居視其所親): 평소에 그가 누구와 친하게 지내는지를 관찰하라!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주변 사람을 먼저 보라는 말이 있다. 그 사람과 친분을 맺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2. 부시기소여(富視其所與): 가 만약 부자라면, 누구에게 자신의 부를 베풀고 있는지를 관찰하라! 그 사람이 어디에 돈을 쓰고 있는지를 보라는 것이다. 자신의 몸을 치장하고 오로지 가족만을 위해 돈을 쓰는지, 아니면 어려운 사람에게 자신의 부를 나누고 있는지를 보라는 것이다.

 

3. 원시기소거(遠視其所擧): 그가 만약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을 채용하여 쓰고 있는지를 관찰하라! 그 사람이 뽑아 쓴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의 인재를 보는 눈을 알 수 있다. 아무리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사람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4. 궁시기소불위(窮視其所不爲): 그가 만약 어려운 처지에 있다면, 그가 어떤 일을 하지 않는지를 살펴보라! 사람이 궁해지면 해서는 안 될 일도 서슴지 않고 하게 마련이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5. 빈시기소불취(貧視其所不取): 그가 만약 가난하다면, 그가 취하지 않는 것을 관찰하라! 가난하면 받아서는 안 될 것을 받게 된다. 비록 힘들고 어려운 생활이라도 부정한 것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극의 인재판별 요점은 그 사람의 현재 처지에서 얼마나 적절한 행동을 하며 살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이다. 주변 사람과의 교유는?, 자신의 부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나?, 어떤 인재를 등용하여 같이 일을 하는가?, 어려운 처지에도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는가?, 또 물질에 현혹되지 않는 굳건한 청렴함이 몸에 베여있는가? 사람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이다. 


특히 공무원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마음 가짐이랄까? 진정으로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자격으로는 사람을 선별할 때 눈에 보이는 학력이나 경력을 보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무늬만 보고 잘못 결정했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 본질을 꿰뚫고 진실을 볼 줄 아는 인재를 보는 눈이 필요한 시기다.    



예문 3>


당태종 오두막으로 알고 속아서 배에 오르다...


‘정관(貞觀)의 치(治)’ 로 유명했던 당태종이 3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정벌하러 갈 때 바닷가에 이르렀다. 끝없이 펼쳐진 망망한 바다의 위용 앞에서 당 태종은 바다를 건넌다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하고 주저하였다.


이때 바닷가 근처에 사는 어느 귀족 노인이 황제에게 나아가 자신이 황제의 30만 대군을 위해 양식을 준비하였으며 황제를 모시고 자신의 집에서 주연을 베풀고 싶다고 청하였다.


황제는 기쁘게 백관들을 데리고 그 노인의 집으로 갔다. 노인의 집은 사방이 오색찬란한 장막으로 덮여 있었는데 노인은 황제를 모시고 실내로 인도하였다.


백관들과 황제는 술을 마시며 노인이 베푼 연회를 즐겼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나더니 파도소리와 함께 술잔이 뒤엎어지고 사람들이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당 태종이 깜짝 놀라 보좌관에게 장막을 걷어보라고 명령하였는데 밖은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였고 어디에도 노인의 집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있는 곳은 바로 전함 안 이었고, 30만 대군은 이미 황제와 함께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다.


원래 이 노인은 새로 부임한 설인귀(薛仁貴)라는 장군이 분장한 것이었다. 황제가 바다를 두려워하여 건너는 것을 꺼리자 천자를 속이고 바다를 건너기 위하여 ‘만천과해’의 전술을 사용한 것이었다.




1-2, 제2계 위위구조(圍魏救趙): 위나라를 포위(包圍)하여 조나라를 구한다.


"정면충돌(衝突)을 피하고, 상대의 허점(虛點)을 공략(攻掠)함을 비유한 뜻."



예문1>


'손무'가 죽은 지 100여년 후에 손자(孫子) '손빈'(孫賓)이라는 사람이 태어났다. '손빈'은 일찍이 '방연'(龐涓)과 함께 속세를 등지고 은둔한 학자인 "귀곡자"에게 학문과 병법을 배웠는데, '방연'은 항상 '손빈'의 능력이 자신 보다 뛰어난 점을 시기하였다. 이러한 '방연'의 속내를 '손빈'은 알지 못하였다. 훗날 '손빈'은 '방연'의 계략에 휘말려 두 다리가 잘리는 형벌과 이마에 글자를 새겨 넣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기원전 353년, '위(魏)나라의 혜왕(惠王)'은 장군 '방연'을 보내 '조(趙)나라'를 공격하여 신속하게 '조나라'의 도읍 '한단(邯鄲)'을 포위하였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조나라'는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제나라 위왕(齊威王)'은 '손빈'을 장군으로 삼아 파견하려고 했는데, '손빈'은 자신의 형기(刑期)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이에 '제위왕(齊威王)''은 '전기(田忌)'를 장군으로 삼고 '손빈'을 군사(軍師)로 삼아 작전을 돕게 했다. '전기(田忌)'가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로 가려 할 즈음 '손빈'이 말했다.


"엉킨 실은 풀려고 마구 잡아 당겨서는 아니 됩니다. 마찬가지로 전투에서도 주먹만 휘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무방비 상태인 상대방의 허점을 찌르는 것이 좋으며, 그러면 싸움은 저절로 풀리게 됩니다.

- (解雜亂, 紛糾者, 不控捲, 救鬪者, 不搏, 批亢搗虛, 形格勢禁, 則自爲解耳 - 부해잡란, 분규자 불공권,  구투자, 불박극, 비항도허, 형격세금, 즉자위해이)


지금 '위나라'는 정예 병력을 모두 국외의 전투에 투입되고 국내에는 노약자들밖에 없을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의 도읍인 '대량(大梁)'을 직접 공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소문을 내어 '방연'의 귀에 들어 가게 하면 '위나라' 군대는 반드시 '조나라' 포위를 풀고 '대량'을 방어하기 위해 회군할 것입니다. 그때 군사들을 '방연'이 오는 길에 매복을 시켜 한번에 공격을 하면 대승을 하 것 입니다. "


'전기'는 '손빈'의 계책에 따랐다. '위 장군 방연'에게 '제나라' 장군 ‘정기’가 '위'의 수도 '대량'을 공격한다는 소문을 내고 그들이 오는 길목에 매복을 하였다. 예상대로 '위나라' 군대는 '조나라'에서 철수하고 '계릉(桂陵; 지금의 산동성)'에서 '제나라' 군대와 싸우게 되었는데, 크게 패하고 말았다.


其後魏伐趙,趙急,請救於齊。齊威王欲將孫臏,臏辭謝曰: 刑餘之人不可。於是乃以 田忌爲將,而孫子爲師,居輜車中,坐爲計謀。田忌欲引兵之趙,孫子曰: 夫解雜亂紛糾者不控捲,救鬥者不搏撠,批亢擣虛,形格勢禁,則自為解耳。今梁趙相攻,輕兵銳卒必竭於外,老弱罷於內。君不若引兵疾走大梁,據其街路,衝其方虛,彼必釋趙而自救。是我一舉解趙之圍而收獘於魏也。田忌從之,魏果去邯鄲,與齊戰於桂陵,大破梁軍。




1-3, 제3계 차도살인(借刀殺人): 남의 칼로 사람을 해치다.


"자신의 힘이 부족하거나, 자신의 힘을 보존해야만 할 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힘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이다."



예문1>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등장하는 ‘동탁’과 ‘여포’, 그리고 ‘왕윤’....


‘왕윤’은 ‘동탁’을 제거하기 위해 ‘여포’를 끌어들여 ‘동탁’과 ‘여포’ 간의 갈등을 극대화시키고, ‘여포’의 불만을 부채질해서 마침내 ‘여포’로 하여금 ‘동탁’을 죽이게 하였다. 이것이 아주 간단한 '차도살인(借刀殺人)'이라 할 것이다.


★. ‘왕윤’은 ‘초선’을 이용해 ‘여포’와 ‘동탁’을 이간질한 게 아닌가?...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초선’은 100% 가공의 인물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인물을 ‘나관중’이 ‘여포’와 ‘동탁’ 간의 갈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창조해 낸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는 ‘여포’가 ‘동탁’의 첩들을 자주 건드려서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깊었다고 한다.) 원문에는 다음과 같은 해설이 실려 있다.


"적의 태도는 명백하고, 우군의 태도는 정해지지 않았다. 이때에는 우군을 전투에 끌어들여 적과 싸우게 하고, 아군의 전력은 보존한다. [敵已明,友未定,引友殺敵,不自出力,以損推演.]"



예문 2>


적벽의 싸움을 앞두고 ‘제갈량’에 대한 회유책이 실패하자 ‘주유’는 이를 갈았다. 장차 ‘오(吳)’에 화근이 될 ‘제갈량’을 죽여야겠다고 마음먹은 ‘주유’는, ‘제갈량’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한다.


"전에 ‘조조’는 군사가 적었고, ‘원소’는 군사가 많았는데도 ‘조조’가 ‘원소’를 이긴 것은, ‘허유’의 계책에 따라 오소의 군량을 불태웠기 때문이었소. 지금 ‘조조’의 군사는 83만이나 되고, 우리 군사는 고작 5~6만 명뿐이니 어찌 막을 수가 있겠소? 역시 ‘조조’의 군량을 먼저 없앤 다음에야 무찌를 수 있을 것이오. 알아본 바로는, ‘조조’군의 군량은 취철산에 쌓여 있다고 하오. 내가 군사 1천을 드릴 터이니 선생께서는 취철산으로 가서 ‘조조’의 糧道(양도)를 끊도록 하시오. 피차가 각각 주인을 위하는 일이니 핑계대지 않으리라 믿으오."


‘제갈량’이 생각하기를, 이는 분명히 자신을 죽이기 위해 ‘주유’가 수를 쓰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기꺼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제갈량’이 막사를 나간 후, ‘노숙’이 ‘주유’에게 물었다.


"공명에게 군량을 기습하게 한 것은 무슨 뜻이오?"


"내 손으로 ‘공명’을 죽이자니 남들의 비웃음을 살 것 같아, ‘조조’의 손을 빌어 후환을 제거하려는 것이오."


‘노숙’은 이 말을 듣고, ‘제갈량’이 이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갈량’의 막사를 찾아갔다. ‘제갈량’은 별 어려워하는 기색 없이 군마를 정돈하여 떠나려 하고 있었다. ‘노숙’은 차마 보낼 수가 없어서 말로 떠보았다.


"선생께서는 이번에 공적을 세울 수 있으시겠소?"


"나는 수전이건, 육전이건, 기마전이건, 전차전이건 절묘하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소. 공적을 이루는 것 쯤 무엇하러 걱정을 하겠소? 잘하는 것이 한 가지밖에 없는 강동의 공(노숙)이나 주랑(주유)과 비교가 되지 않소."


"나와 공근(주유)이 어찌 잘하는 것이 한가지 밖에 없다 하시오?"


"내가 길거리에서 노래를 듣다 보니, '길에 잠복해 관문을 지키는 데는 자경(노숙)을 써고, 강을 사이에 두고 물에서 싸우는 데는 주랑(주유)이 있다' 하더이다. 


공은 육지에서는 다만 길에 매복하여, 요충을 지키는 것만 잘하고, ‘주공 근’은 다만 수전만 잘할뿐 육전은 못한다는 것이 아니겠소."


‘노숙’은 이 말을 그대로 ‘주유’에게 전했다. 그러자 ‘주유’가 성을 내며 말했다.


"어찌 내가 육전을 못한다고 깔보느냐! ‘공명’을 보낼 필요는 없다. 내 스스로 1만 기병을 끌고 취철산으로 가겠다!"


‘노숙’이 또 이 말을 ‘제갈량’에게 전했다. ‘제갈량’이 웃으며 말했다.


"공근이 나에게 양도를 끊으라 한 것은 실은 ‘조조’를 시켜 나를 죽이려 한 것이었소. 그래서 내 일부러 농을 한 것인데 ‘공근’은 즉각 내받고 있구려. 이제 사람을 쓸 때 서로 협력하면 큰 공을 세울 수 있겠지만, 만일 서로 해치려 한다면 큰일은 물 건너가고 말 것이오. ‘조조’는 속임수가 많아 평생 남의 양도를 끊는데 이골이 난 사람이오. 어찌 많은 군사로 방비하고 있지 않겠소? ‘공근’이 간다면 반드시 잡히고 말 것이오. 지금은 수전으로 북의 군사들의 기세를 꺾어야 하오. 바라건대 ‘자경’은 좋은 말로 ‘공근’에게 전해주면 좋겠소."


‘노숙’이 ‘주유’에게 이야기를 전하자, ‘주유’는 머리를 흔들고 발을 구르며 말했다.


"이 사람은 식견이 나보다 열 배는 낫소. 만일 지금 제거하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우리나라의 화가 될 것이오."


예문3>


‘유비’가 자신을 영웅이라 하는 ‘조조’에게서 도망쳐, 서주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조조’는 화를 내며 군사를 일으키려 하지만, 모사들의 만류로 장수와 ‘유표’를 먼저 귀순시키기로 한다. 누구를 사자로 보낼까 하는데 ‘순유’가 ‘공융’을 천거한다. ‘공융’은 자신보다 낫다며 ‘예형’을 추천한다.


‘조조’가 ‘예형’을 불러 왔다. ‘예형’이 인사를 마쳤으나 ‘조조’는 앉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예형’은 ‘조조’의 부하들을 크게 비꼰다.


"‘순욱’은 조상이나 문병을 보내기에 알맞은 사람이고..

 ‘순유’는 분묘나 지킬 사람이고...

 ‘정욱’은 문지기나 할 사람이고...

 ‘곽가’는 그저 詞賦(사부: 운자() 달아 지은 한시() 통틀어 이르는 .)나 외게 할 사람이고..

 ‘장료’는 북이나 징을 칠 사람이고... 

 ‘허저’는 소, 말이나 먹일 사람이고...

 ‘악진’은 詔狀(조장: 제사나 부음을 알리는 글)이나 읽히기에 알맞고...

 ‘이전’은 격서나 전달시킬 사람이며...

 ‘여건’은 칼갈이나 시킬만하고...

 ‘만총’은 술독청소나 시킬만하며...

 ‘우금’은 담쌓는 일이나 시킬만하고...

 ‘서황’은 개, 돼지 잡는 일이나 시킬만 하옵니다... 

 ‘하후돈’은 완체장군(제 몸만 위하는 장군)이라 일컫고...

 ‘조자효(조인)’는 요전태수(토색질 태수)라 부르고...

  그 밖에는 모두 옷걸이고 밥통, 술통, 고깃자루일 뿐이옵니다."


'예형'의 말을 다 들은 '조조' 옆에 있든 ‘장료’가 칼을 빼어 ‘예형’을 죽이려 하였다. 급히 ‘조조’가 말했다.


"마침 고수 한 사람이 부족하다. 이 직책을 맡기도록 하라."


‘장료’가 왜 ‘예형’을 죽이지 않느냐고 묻자, ‘조조’가 대답했다.


"그자는 실속없이 명성만이 알려져 있는 자이다. 오늘 죽인다면 천하는 반드시 나에게 큰 사람을 용납하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저만 잘난체하는 그 자에게 북이나 치게 하여 욕을 보이려는 것이다."


조하연향(朝賀宴享: 동지(), 정조(), 즉위(), 탄일(따위 경축일에 신하 조정() 나아가 임금에게 하례하는 이나 또는 그런 의식 이르던 행위.) 날이 되어 ‘예형’이 왔다. ‘예형’이 헌옷을 입은 채 묘당에 들어갔는데, 묘당에 들어갈 때는 새 옷을 입는 것이 관례였다. 어째서 옷을 갈아입지 않는가 하고 좌우에서 호통을 쳤다. ‘예형’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모두 벗었다. ‘조조’가 꾸짖자 ‘예형’은 태연하게 또 ‘조조’를 비꼬았다. ‘조조’가 ‘예형’에게 말했다.


"너를 사자로 형주에 보내겠다. 만일 ‘유표’가 와서 항복한다면 너를 공경으로 등용하겠다."


이윽고 ‘예형’은 형주로 가서 ‘유표’를 만나고 인사를 했지만, 여전히 ‘유표’를 비꼬아 헐뜯었다.


‘유표’는 기분이 상해 강하태수 ‘황조’를 만나보라며 ‘예형’을 보냈다. 수하의 사람이 왜 ‘예형’을 죽이지 않느냐고 묻자 ‘유표’는 이렇게 말했다.


"예형이 여러 번 ‘조조’를 모욕했지만 ‘조조’가 죽이지 않은 것은 인망을 잃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사신으로 보낸 것이다. 내 손을 빌려 ‘예형’을 죽이고 현자를 죽였다는 오명을 내게 씌우려는 것이다. 내가 지금 ‘황조’에게 그를 보낸 것은 ‘조조’에게 나도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후 ‘황조’는 ‘예형’에게 크게 모욕을 당해 ‘예형’을 죽였다.

...이 역시 차도살인(借刀殺人)이라 할 것이다.




1-4, 제4계 이일대로(以逸待勞) : 피로에 지친 적과 싸운다.


사실 굳이 이 예가 아니더라도, '적이 지치기를 기다려 공격한다'는 말 자체는 수많은 역사에서 셀 수 없이 많을 정도로 등장한다. 하지만 적이 지치기를 기다린다고 해서 상대방이 지치는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적의 기세가 계속 올라 결국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함락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또 하나의 이일대로의 예로는 역시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사실상의 최종장면, 오장원의 싸움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예문>

제갈량은 오장원에 둔치고 위의 사마의와 한 판 대결을 벌이려 했으나 사마의는 절대로 나와 싸우려 하지 않았다. 촉군이 오장원에 둔을 친 것으로 보아, 머지 않아 촉군 내에 변고가 생기리라 본 것이었다. 그러자 조급해진 제갈량은 부인들이 쓰는 두건과 흰 명주로 지은 여자옷 한 벌을 편지와 함께 사마의에게 보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달(사마의)! 기왕 대장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왔으면 갑옷을 걸치고 칼을 들고 자웅을 가릴 생각은 하지 않고 땅굴 속에 틀어박혀 화살과 칼을 피하고만 있으니, 아녀자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이에 부인들이 쓰는 두건과 흰 옷을 보내니 만일 싸우지 않으려거든 두 번 절하고 받으시오. 만일 조금이라도 부끄러운 마음이 있고, 아직 사내다운 기개가 남아있다면 싸울 날짜를 보내기 바라오.>

이에 많은 魏軍(위군) 장수들은 분개하여 나가 싸우고자 하였으나 사마의가 이를 말렸다. 하지만 장수들이 워낙에 거세게 분개하는 바람에 사마의가 말릴 수 없게 되자, 사마의는 황제에게 표를 올렸다. 

표의 내용은 '제갈량이 이렇게까지 모욕을 해오니 나가서 싸우고 싶습니다'였다. 

이에 위명제는 사마의가 자신의 위세를 빌려 장수들을 말리려는 의중을 꿰뚫고는, 
'절대로 나가서 싸우지 말라'는 내용의 명령을 내렸다. 

이에 사마의는 '황제의 명령이 이러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며 장수들을 말렸고, 그러는 와중에 촉에서는 제갈량이 결국 병사하고 말았고, 제갈량을 잃은 촉군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역시 많은 '이일대로(以逸待勞)'의 예라 할 것이다.



1-5, 제5계 진화타겁(趁火打劫) :불난집에 들어가 도둑질하다...


이는 "상대의 위기를 틈타 공격한다."라는 뜻이다. 적의 재난과 내분, 외환 등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재빨리 쳐들어가서 승리를 해라는 이야기이다.


“적이 당한 재난이 클 때, 그것을 기회로 삼아 형세에 편승하여 승리를 거둔다. 그것이 강함(剛)으로 부드러움(柔)을 끊는다는 것이다.” [敵之害大,就勢取利,剛決柔也.- 적지해대, 취세취리, 강결유야]



예문1>


초나라와 한나라가 전국을 두고 쟁탈전이 벌렸든 때이다. 촉으로 쫓겨 간 유방이 한신을 앞세우고 진창으로 밀고 나와 순식간에 관중을 점령해 버린다. 물론 이는 三秦王(삼진왕)들과 항우의 방심이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항우가 제나라의 반란을 제압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제나라의 반란이 없었다면 항우가 단번에 유방을 제압해 버렸을 것이다.


항우는 진(秦)제국을 무너뜨린 후 논공행상을 통해 용감히 싸운 장수들을 왕으로 임명했는데, 그 이전에 정치적으로 병사들을 모으고 외교적으로 힘을 기울였던 원래의 왕들은 모두 폐(廢)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제나라의 전영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그쪽에 항우가 가 있던 사이에, 유방이 슬그머니 관중(關中: 지금의 서안(진나라 때는 함양, 당나라 때는 서안)을 중심으로 하는 4개의 관문의 중심)을 차지해 버린 것이다.


그 이후에 항우가 유방을 토벌하려 하자 유방은 항우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자신은 고향이 그리워 나왔을 뿐이지, 서초패왕과 다툴 생각이 없다. 오히려 제나라 쪽이 위험하니 그 쪽에나 신경을 쓰라'는 내용이었다. 항우는 그 말을 믿고 제나라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사이에 유방은 야금야금 세력을 넓혀갔던 것이다.


또한 유방이 항우를 최종적으로 이기는 데에는 한신의 힘이 컸다. 한신은 유방의 휘하군이 아니라 별동대로서 활약했다. 항우가 유방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사이에 한신이 항우가 없는 곳에서 세력을 키워 마침내는 항우와 유방보다도 큰 세력을 이루게 된다.


역사에서 가장 흔히 살펴볼 수 있는 예는 '적의 군주나 장수가 죽어서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에 쳐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그에 못지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적이 상(喪)을 당했을 때 공격하는 것은 인의(仁義)에 어긋납니다.' 라며 말리는 신하들의 모습이다. 그만큼 성공한 예도 많고, 실패한 예도 많다.



예문2>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서주에서 살해당하자, 조조는 병사들을 거느리고 서주를 짓밟는다. 그 틈을 타서 승냥이 여포가 연주를 함락시키고 복양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조는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하지만 서전에서 여포에게 패하고, 거기에 복양에서 여포의 계략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한다. 겨우 살아난 조조는 복수를 꾀한다.


"하찮은 놈의 계략에 빠졌구나. 내 반드시 복수해 주리라."


곽가가 말한다.


"어서 계책을 펴소서."


"지금은 놈들의 계책을 역이용해야겠다. 내가 화상을 입고 火毒(화독)이 퍼져 오경 때 이미 죽었다고 거짓말을 퍼뜨려라. 여포는 반드시 군사를 이끌고 공격해 올 것이다. 우리는 마릉산 속에 숨어 있다가 그들을 치면 여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군사들에게 상복을 입히고 發喪(발상)준비를 하도록 하며 조조가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식을 들은 여포는 즉시 공격해 들어왔다 하지만 조조의 매복군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겨우 복양으로 돌아갔다.


이는 ‘진화타겁’을 역으로 이용한 예이다.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상(喪)을 기화로 공격하거나 이를 역으로 이용하는 계략이 부지기수였다.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예라 할 것이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상(喪)을 이용한 계략이라 하면, 다음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도망치게 했다'는 이야기.


예문3>


오장원에서 대치하고 있던 위(魏)와 촉(蜀). 제갈량이 계속 싸움을 걸어도 절대로 싸우지 않던 사마의는 어느 날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제갈량이 죽었음을 예감한다. 그리고 촉군이 물러가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는 제갈량이 죽었다고 확신하고 병사들을 이끌고 추격에 나선다.


하지만 후미의 사륜거에 제갈량이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크게 놀라 도로 달아난다. 후에 제갈량이 생전에 만들어 놓은 나무인형이었음을 알고는 제갈량의 재주에 감탄해 마지않는다.


*. 이 '진화타겁'은 내용상 바로 앞의 '이일대로'와 연결되는 계략이다. '이일대로'로 적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리고, 그러한 상태의 적을 공격하는 것이 '진화타겁'인 것이다.



1-6, 제6계 성동격서(聲東擊西):동쪽에서 소리 지르고 서쪽으로 공격한다.


동쪽을 공격할 것처럼 하여 상대방이 그 쪽을 방비하게 하고, 방비가 허술한 서쪽을 공격한다.

“적의 정세판단이 흩어져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게 되면 고여있던 물이 점차 불어나 넘쳐흐르는 상태가 되어 막지 못한다.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이익을 챙길 따름이다.” 

[敵志亂萃,不虞,坤下兌上之象,利其不自主而取之.]



예문1>


하북의 강자, 원소는 조조를 치기 위해 군사를 몰아 조조의 본거지인 허도(허창)로 향했다. 그리고는 선발대를 황하 건너로 보내 백마를 포위하여 공격하고 있었다. 이에 조조는 병력을 이끌고 백마를 구원하러 가고자 했다. 이 때 조조의 병력은 원소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그 때 조조의 모사 중 한사람인 순유가 건의한다.


"적은 수가 많으니 우선 분산시키지 않으면 부수기 힘듭니다. 먼저 서쪽의 연진으로 향해서, 황하를 건너 적의 배후로 우회하는 듯한 태세를 보여야 합니다. 그러면 원소는 반드시 서쪽으로 군을 이동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그 틈에 재빨리 백마로 급행해서 불시에 무찔러야 합니다."


조조는 바로 이 '성동격서'의 전략을 택했고, 그 선택은 적중했다. 원소는 급히 군사를 나누어 서쪽으로 보냈고, 조조는 원소의 분할된 군대를 섬멸할 수 있었다.



예문2>


유비가 오(吳)로 부터 형주를 얻어 안주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익주를 다스리고 있던 유장은 한중의 장로(오두미교의 교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에 유장은 동족인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게 되고, 유비는 방통의 조언을 받아들여 유장을 치고자 마음먹는다.


이후 방통의 계략에 따라 익주의 성들을 하나둘 장악해 나간다. 하지만 방통이 낙봉파에서 죽게 되고, 기세가 꺾인 유비는 제갈량에게 원군을 보내달라 한다. 이에 제갈량은 관우에게 형주를 맡기고 스스로 나선다. 이때 조운, 장비도 함께 나서게 된다.


기세 좋게 전진해 나가던 장비였으나 巴郡(파군)에서 발이 멈추고 만다. 파군을 지키는 노장 엄안에게 발이 묶여 앞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아무리 싸움을 걸어도 엄안이 싸움에 임하지 않자 장비는 초조해졌다. 그 때 부하 장수 한 사람이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 파군을 지나갈 수 있는 샛길을 발견한다. 이에 장비는 그 날 밤으로 바로 군사들을 이끌고 샛길로 지나갈 계획을 세운다.


"오늘 밤 이경에 밥을 지어먹고 삼경에 달이 밝은 틈을 이용하여 영채를 거두고 모두 출발한다. 사람은 입에 함매를 물고 말방울은 모두 떼어낸 뒤 조용히 가야 할 것이다. 내가 직접 앞에서 길을 열 것이니, 너희들은 조용히 따라오도록 하라."


하지만 엄안이 파견한 염탐꾼들이 이 소식을 알고 즉각 엄안에게 보고했다. 엄안은 즉시 병사들에게 싸움에 나설 준비를 시킨다. 밤이 되고, 삼경이 지나 장비는 조용히 군사들을 이끌고 전진했다. 엄안은 장비와 병사들의 이동을 확인한 후 병사들을 움직여 기습을 가했다. 하지만 그 순간 뒤에서 큰소리가 나며 한 무리의 군사들이 덮쳐왔다.


"늙은 놈아, 달아나지 말라! 내 너를 만나기를 고대했는데, 마침 잘 만났구나!" 엄안은 깜짝 놀라 돌아보았는데 그 곳에는 앞에 지나갔을 터인 장비가 있었다. 먼저 지나간 장비는 가짜였던 것이다. 샛길로 가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뒤에 대기하고 있다가 엄안이 나오자 공격한 것이다.


장비가 엄안을 잡기 위해 계책을 세운 것이었다. 엄안은 장비에게 붙잡히고 만다. "너희들은 의리도 없이 우리 주군(유장)을 침략하고 있다! 그러니 斷頭將軍(단두장군 : 머리 잘린 장군)은 있을 지언정 어찌 降將軍(항장군 : 항복한 장군)이 있으리오!"


하지만 엄안은 붙잡히고 나서도 오히려 당당한 태도를 보여 장비는 그에게 감탄하게 된다. 그래서 장비는 엄안의 목숨을 살려주고, 엄안은 장비의 恩義(은의)에 감복하여 항복한다...


이 역시 샛길로 가는 척하면서 적을 꾀어내어 공격하는 '성동격서'의 예라 할 것이다.

...여기의 장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이 부분에서 모종강(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재편한 사람)은 총평에 이렇게 쓰고 있다.


"...장비는 평생 속시원한 일을 몇 번 했다. 督郵(독우)를 매질하고, 呂布(여포)에게 욕을 하고, 長坂橋(장판교)에서 호통을 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용기는 嚴顔(엄안)을 사로잡은 지혜만 못했다. 또한 엄안을 사로잡은 지혜는 엄안을 살려준 현명함만 못하다..."


술 좋아하고, 성격 급하고, 머리 나쁜 모습으로 흔히 묘사되는 장비이지만, 正史(정사)에 의하면 장비는 知勇(지용)를 겸비한 名將(명장)이었다고 한다. 연의에서는 후반부에서나 제갈량에게 감화되어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 식으로 간간히 계략을 쓰는 모습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장비가 쓴 계략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2. 적전계(敵戰計):'敵戰計(적전계)'의 敵은 '원수 적'이지만, '짝 적'으로도 즉, ‘라이벌’로도 해석이 된다. '필적하다'는 의미이며, '견줄만하다'는 뜻도 된다. 따라서 '적전계(敵戰計)'란 아군과 적과 병력이 비슷할 때 사용하는 계략을 뜻한다.


하지만 단순히 적과 병력이 비슷하다고 해서 무턱대고 사용하는 계략은 아니다. 적과 병력이 비슷해서 '어느 쪽도 섣불리 움직이기 힘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사용되는 계략이 '敵戰計'인 것이다.



2-1, 제 7계 무중생유(無中生有) : 지혜로운 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속이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속이는 것만은 아니다. 그 속이는 바를 실속있게 만드는 것이다. 無에서 有로, 虛에서 實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誑也,非誑也,實其所誑也.少陰,太陰,太陽.]



예문>


적벽대전. 그 적벽대전 직전의 吳의 대도독 주유는 후에 화근이 될 제갈량을 죽이고자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제갈량을 죽여야 한다는 주유의 결심은 확고해져 갔다. 그러다가 군사회의에서 주유가 제갈량에게 물었다.


"며칠 내에 조조와 싸우게 될 듯싶소. 강에서 싸우자면 무슨 무기가 필요하겠소?"


"큰 강 위에서는 활과 화살이 주가 되어야겠지요."


"내 생각이 선생의 생각과 같소. 그러나 우리 군중에는 바로 그 화살이 부족하오. 수고스럽지만 선생께서 화살 10만개만 만들어 주시지 않겠소? 이것은 공적(公的)인 일이니 거절하지 말아주시오."


"도독께서 부탁하시니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화살 10만개는 언제 쓰시려 하십니까?"


"열흘 안에 만들어 주실 수 있겠소?"


"조조의 군사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열흘이나 허비하다가는 큰일을 그르칠 것입니다."


"그러면 며칠이나 걸릴 것 같소이까?"


"사흘이면 화살 10만개는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軍中(군중)에는 戱言(희언:농담)이 있을 수 없소!"


"어찌 감히 농담을 하겠습니까? 사흘 안에 화살 10만개를 조달하지 못하면 중벌을 받겠다는 軍令狀(군령장)이라도 써 드리겠소."


주유는 대단히 제갈량이 스스로 함정에 빠졌다며 대단히 기뻐했다. 제갈량이 사흘 안에 화살 10만개를 만들지 못하면 군령을 어긴 죄로 죽여 버릴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노숙에게 일의 처리 상황을 보고하도록 했다. 노숙은 명령을 받고는 제갈량에게 갔다. 제갈량이 노숙에게 말했다.


"내가 자경(노숙)에게 누차 말하지 않았소? 공근(주유)에게 말하면 그가 반드시 나를 해치려 할 것이니 말하지 말라고. 그 덕에 내가 공경에 빠지게 되었으니, 자경이 나를 구해주어야겠소."


"공이 스스로 화를 불렀는데, 내가 어찌 구해드릴 수가 있겠소?"


"자경은 나에게 배 스무 척만 빌려주시기 바라오. 배마다 30명의 군사가 있어야 하오. 배는 푸른 장막으로 둘러치고 그 속에 짚단 1천여 단을 배 양쪽으로 나누어 쌓아 주오. 나에게 쓸 곳이 있소. 그러나 공근에게 또 알려서는 아니 되오."


노숙은 그 뜻은 알 수 없었으나,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주유에게 제갈량은 대나무, 새깃, 아교(화살을 만드는 재료들)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약속한 배에 대한 것은 말하지 않았다. 주유는 의아해하며 어쨌거나 사흘 동안 기다려 보기로 했다.


노숙은 쾌속선 20척을 선발하여 제갈량이 말한대로 준비를 해두고 제갈량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첫째날, 제갈량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둘째날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사흘째 되는 날 새벽에 제갈량은 노숙을 찾았다.


"이제 화살을 가지러 갑시다."


"어디 가서 가져온다는 것이오?"


"물어볼 것 없이 가보면 아시게 될게요."


제갈량은 즉시 배를 긴 밧줄로 연결하게 한 다음 북쪽을 향해 이동했다. 이 날의 장강은 안개가 짙게 끼어 눈 앞에 있는 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새벽 오경 무렵이 되자 배들은 조조의 수상영채 가까이 접근하게 되었다. 제갈량은 뱃머리를 서쪽으로 향하게 하고 배꼬리가 동쪽으로 향하게 하여 배를 한 줄로 늘어세웠다. 그리고 배 위에서 병사들에게 북을 치며 함성을 지르라 명했다. 노숙이 깜짝 놀랐다.


"조조의 병사들이 공격해 오면 어찌합니까?"


"공은 아무 걱정 말고, 나하고 술이나 드십시다."


한편 보고를 받은 조조는 이렇게 명령했다.


"짙은 안개 속에서 갑자기 쳐들어 온 것을 보면 반드시 매복이 있을 것이다. 절대로 가벼이 나가지 말고, 수군 궁노수를 동원하여 난전을 쏘도록 하라. 그리고 장료와 서황의 육상 궁노군 3천명씩을 대동하여 강변으로 나와 화살을 쏘아 돕도록 하라."


이리하여 조조의 궁노수 대략 1만여명이 강을 향해 화살을 쏘아 댔다. 화살은 빗발치듯 날아들었다. 제갈량은 이번에는 뱃머리와 배꼬리의 방향을 바꾼후 한층 더 힘차게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게 했다. 화살은 더욱 빗발치듯 쏟아졌다.


해가 높아져 안개가 걷힐 즈음 제갈량은 재빨리 배를 거두어 돌아가자는 명을 내렸다. 그리고 배의 모든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치게 했다.


"승상! 화살 고맙게 잘 쓰겠소!"


노숙이 가져온 쾌속선은 워낙에 빨라, 조조의 수군이 따라잡을 수 없었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제갈량이 노숙에게 말했다.


"배마다 5~6천개의 화살이 꽂혀있을 것이오. 조금의 힘도 들이지 않고 10만개의 화살을 얻었소. 내일이라도 바로 조조의 병사들에게 쏘아 돌려줘도 될 것이오."


"선생은 참으로 神人(신인)이시오. 오늘 이렇게 짙은 안개가 낄 줄 아셨소이까?"


"장수가 되어 천문을 알지 못하고, 지리를 알지 못하고, 기문을 알지 못하고, 음양을 알지 못하고, 진도를 볼 줄 모르고, 병세에 밝지 못하다면 이는 용렬한 사람이오. 나는 이미 사흘 전에 오늘 짙은 안개가 낄 줄 알고 말미를 사흘로 잡은 것이오. 공근은 화살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나를 죽이려 했겠지만, 내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어찌 공근이 나를 죽일 수 있겠소?"


노숙은 가슴 깊이 감복했다. 돌아가자 노숙은 주유에게 자세히 보고했다. 그러자 주유는 크게 놀라 개연히 탄식했다.


"공명은 지략이 귀신같소이다. 나는 따라가지 못하겠소."


...이 일화야말로 완벽한 '無中生有(무중생유)'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마치 '무중생유'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무중생유'의 본질을 제대로 보여주는 일화이다. 물론, 연의에서의 이야기일 뿐이지, 실제로 제갈량이 저런 일을 하지는 않았다. 삼국지연의의 뻥을 이야기할 때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일화이기도 하고.



2-2, 제 8계 암도진창(暗渡陳倉) : 아무도 모르게 진창으로 나아가다


이 계략도 '위위구조'와 마찬가지로 실제 사례를 성어화한 것이다.


예문1>


홍문의 연회에서 살아난 유방은 항우의 명에 따라, 漢中王(한중왕)으로 임명되어 파촉(현재 사천성 일대) 땅으로 가게 되었다. 파촉, 그 곳은 들어가기에도 험난한 땅이어서 예로부터 죄인을 유배 보내던 곳이었다. 땅이 너무 험난하여 길이 따로 없었고, 절벽에 선반을 놓아 만든 棧道(잔도)라는 길을 이용했다.


하지만 이 잔도는 너무도 위험하여 부임지로 가는 동안에만 수많은 병사들이 탈영했고, 심지어 장수들까지도 도망치는 자가 많았다. 이에 유방은 병사들이 잔도를 다 건너온 후 잔도를 불태워 버린다. 이는 병사들의 탈주를 막기 위한 것이기도 했고, 三秦(삼진)의 왕들에게 자신은 관중으로 다시 나갈 의지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파촉으로 들어온 유방은 한신을 만나게 되고 그를 대장군으로 삼아 관중으로의 진출을 꾀하게 된다. 이에 한신에게 주어진 무엇보다 큰 임무는 바로 불태워 버린 잔도의 보수였다. 이에 한신은 병력 1만을 주고 번쾌에게 잔도를 3개월 안으로 보수하라는 명을 내린다.


한편 유방이 파촉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삼진의 왕 중 장한은 신속히 잔도 보수 상황을 알아보았다. 그리고는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실제 잔도는 1만의 군사가 3개월이 아니라 3년의 시간이 걸려도 보수될까 말까 한 정도였다. 이에 장한을 비롯한 삼진의 왕들은 마음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한신의 생각은 잔도의 보수가 아니었다. 잔도의 보수가 오래 걸릴 것이라 보고 삼진의 왕들이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한신은 진령산맥을 우회하여 단숨에 전략적 요충지인 陳倉(진창:지명)을 점령해 버렸다. 그리고는 기세를 몰아 삼진왕들을 무찌르고 단숨에 관중을 차지해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유방은 파촉에 부임하는 漢中王(한중왕)으로 임명된지 불과 석달만에 항우와 어깨를 겨루는 楚漢之爭(초한지쟁)에 접어들게 된다.


이 고사성어는 정확히, '明修棧道, 暗渡陳倉(명수잔도, 암도진창)' 이라고 한다. '잔도를 수리하는 것처럼 보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창으로 건너가다'는 의미이다. 이를 줄여 '암도진창'이라 한 것이다. 또한 이 성어는 비단 삼십육계에서만이 아니고, 중국의 史書(사서)에서 '뒷전에서 딴 짓을 하는 행위'를 나타내는 말로 흔히 사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양동을 벌여 적이 이에 따라 움직이게 되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기습한다.” [示之以動,利其靜而有主,益動而巽.]


승전계에 속해 있는 '성동격서'와도 비슷한 계략이라 볼 수 있다. 차이점이라면 그것이 '승전계'인가 '적전계'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 실제 삼십육계의 내용은 체계적이지 못해서 비슷비슷한 계략이 많이 등장한다.


*. 이 '암도진창'은 삼십육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 계략이 유용하고 어쩌고의 문제가 아니라, '삼십육계를 孫子(손자)가 지은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는 점. 孫武(손무)가 살았던 시대는 春秋時代(춘추시대) 말기, 손빈이 살았던 시대는 戰國時代(전국시대) 말기이다. 따라서 전국시대를 종결한 秦(진)이 멸망하고, 초한지쟁에 들어서는 시기였던 이 때 일어났던 '암도진창'을 손무나 손빈이 썼을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 孫武(손무)의 생몰연대는 기원전 551년~기원전 479년(공자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 손빈의 생몰연대는 이로부터 100년 후 정도로 추정된다. 이에 비해 한신이 '암도진창'한 것은 기원전 206년의 일이다. ...바보라도 孫子가 삼십육계를 쓰지 않았다는 것은 알 수 있다.



2-3, 제 9계 견안관화(隔岸觀火) : 강 건너 불 보듯 하다.


강 건너 불 보듯 하다. 우리에게도 쉽게 와닿는 말일 것이다. 문자 그대로의 계략이다. 건너편에 불이 나면 그냥 구경이나 하라는 것이다.


“적 진영이 자중지란에 빠지면, 조용히 그들의 변란을 기다린다. 횡폭한 세력은 자멸하기 마련이다. 사태의 변화에 순응하며 순리에 따라 행동하라.” [陽乖序亂,陰以待逆.暴戾恣睢,其勢自斃.順以動豫,豫順以動.]


예문>


관도대전에서의 승리로 원소를 궤멸시킨 조조는 살아남은 원소의 두 아들, 원희(원소의 차남)과 원상(원소의 삼남)을 죽이고자 계속 추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袁家(원가)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 만리장성을 넘어 이민족의 땅에까지 쳐들어갔다. 하지만 조조가 신뢰하던 軍師(군사)인 郭嘉(곽가)가 죽어 조조는 크게 상심하고 있었다. 


"봉효(곽가)가 죽은 것은 바로 하늘이 나를 망치려는 것이오."


그리고 여러 관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러분들은 모두 나이가 나와 비슷하지만 봉효는 한참 적소. 그래서 나는 후사를 그에게 부탁하려 했는데, 이렇게 뜻밖에 요절을 하니 가슴이 미어지는구려." 


곽가를 모시던 사람들이 봉함된 편지를 바치며 말했다.


"곽공께서 돌아가실 무렵 손수 써서 봉해 놓은 편지이옵니다. '승상께서 만일 이 편지대로 하신다면 요동의 일은 평정될 것이다'고 하셨사옵니다."


조조는 편지를 뜯어보고 머리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그 뜻을 몰랐다. 이튿날, 하후돈이 무리를 이끌고 들어와 품했다.


"요동태수 공손강은 오래전부터 賓服(빈복 : 제후가 천자에게 공물을 바치고 복종하는것)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 또 원희와 원상이 가서 의탁했으니 반드시 후환이 될 것이옵니다. 그들이 움직이기 전에 빨리 가서 토벌하는 것이 낫사옵니다. 그래야만 요동을 평정할 수 있습니다."


조조가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이 번거롭게 虎威(호위)를 뽐내지 않아도 며칠 후면 공손강이 스스로 원희와 원상의 머리를 보내올 것이오." 


여러 장수들은 모두 믿으려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났다. 조조는 여전히 군사를 역현에 묶어둔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하후돈과 장료가 들어와서 품했다.


"요동을 정벌하지 않을 것 같으면 허도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유표가 딴마음을 먹을까 두렵습니다."


하지만 조조는..


"원희와 원상의 수급이 오면 즉시 회군하겠다."


여러 사람들은 은근히 비웃었다. 그 때 갑자기 사람이 들어와 공손강이 원희와 원상의 수급을 보내왔다고 아뢰었다. 여러 사람은 모두 크게 놀랐다. 조조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과연 곽봉효의 예상이 틀리지 않는구나!"


조조는 사자에게 큰 상을 내리고 공손강을 양평후 좌장군에 봉했다. 여러 관원이 조조에게 물었다.


"어째서 곽봉효의 예상이 틀리지 않다고 하시옵니까?"


조조는 곽가의 편지를 꺼내 보여주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금 원희와 원상은 요동으로 몸을 의탁하러 갔다고 하는데, 명공께서는 절대로 쳐들어가지 마소서. 공손강은 오래전부터 원씨가 자기의 땅을 빼앗을까봐 두려워했는데 원희와 원상이 의탁하러 갔으니 반드시 의심을 할 것이옵니다. 만일 군사를 이끌고 가서 공격하면 반드시 힘을 합해 맞설 것이니 간단히 쳐부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공격을 늦추고 있으면 공손강과 원씨는 반드시 자기들끼리 죽이고자 획책할 것이옵니다. 그러니 명공께서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시면 되옵니다.>


*. '격안관화'..'강 건너 불보 듯하다'. 뭔가 이상한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가? '삼십육계'를 계속 봐 왔으면 뭔가 이상한 게 있을 것이다. 무슨 얘기냐고? 바로 제5계인 '진화타겁'의 이야기이다. '진화타겁', '불 난 집에 들어가 도둑질하다'.


적진에 생긴 변란을 놓치지 말고 치고 들어가 공격하라는 뜻이었다. '불 난 집에 들어가 도둑질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강 건너 불보 듯 하라'니. 도대체 어쩌라는 소리인가? '삼십육계'에는 '성동격서'와 '암도진창' 같은 비슷한(?) 계략도 있지만, '진화타겁'과 '격안관화' 같은 정반대의 계략도 있다.


*. 郭嘉(곽가). 삼국지(정사와 연의를 통틀어)에 등장하는 모사들 중 그야말로 '천재군사'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유일한 인물...



2-4, 제10계 소리장도(笑裏藏刀) : 웃음 속에 칼이 있다.


웃음 속에 칼날을 숨기다. 우리 옛말에 '솜으로 칼을 싼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말 그대로 부드러운 말씨와 미소짓는 표정으로 상대방의 경계심을 풀고 방심하게 하라는 말이다.


“성의를 보여 적을 안심시키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뜻하는 바를 도모하라. 충분히 준비한 후에 행동하라. 마음속에 ‘剛(강)’을 품고 겉으로는 ‘柔(유)’를 보여라.” [信而安之,陰以圖之,備而後動,勿使有變.剛中柔外也.]



예문>


전통적으로 '소리장도(笑裏藏刀)'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은 '呂蒙(여몽)' 이다. 三國志演義(삼국지연의)에서 ‘관우’를 함정에 빠뜨려 사로잡고, ‘관우’가 죽은 후 그의 혼령에 사로잡혀 죽게 된 인물, 그가 바로 ‘여몽’이다


‘적벽대전’ 이후 ‘유비’는 형주를 차지해 버리고, ‘파촉’을 차지하고, ‘한중(漢中)’까지 나아가 급기야는 스스로 '漢中王(한중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는 ‘관우’에게 ‘형주’를 지키도록 명했다. ‘오(吳)’의 ‘손권’은 ‘형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지만, ‘관우’는 ‘오(吳)’에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에 ‘노숙’의 뒤를 이어 대도독의 자리에 오른 오나라 ‘여몽’은 ‘관우’가 ‘번성’을 치러 간 사이에 ‘형주’를 공략하고자 하나, ‘관우’가 남겨놓은 봉화대가 큰 걸림돌이 되었다.


결국에 ‘여몽’은 자리에 드러눕고 만다. ‘손권’이 크게 걱정하나 '陸遜(육손)'은 그 속을 꿰뚫어 보고 ‘여몽’에게 문병을 간다. ‘여몽’은 ‘형주’를 탈환하고 싶지만 ‘관우’의 봉화대가 걸림돌이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꾀병을 앓은 것이었다. 이에 ‘육손’이 조언을 한다.


"관우는 스스로를 영웅이라고 믿고 자기를 당해낼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소. 염려하는 사람은 오직 장군이 있을 뿐이오. 장군은 이러한 기회에 병을 칭탁하고 사직한 다음, 육구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그 사람에게 ‘관우’를 비굴한 말로 찬미케 하면 ‘관우’는 마음 가득 교만해져서 ‘형주’의 군사를 철수시켜 모두 번성으로 향하게 할 것이오. 만일 형주에 방비가 없다면 어찌 함락시키지 못하겠소?"


‘여몽’은 병을 핑계로 일어나지 않고 ‘육손’을 추천하며 사직을 청했다.


"만일 인망이 두터운 사람을 쓴다면 ‘관우’는 반드시 대비를 할 것이옵니다. ‘육손’은 사려가 깊으나 아직 이름이 덜 알려졌으니 ‘관우’가 경계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 대신 임용하시면 반드시 성과가 있을 것이옵니다."


이리하여 ‘육손’이 ‘여몽’ 대신 육구를 지키게 되었다. ‘육손’은 즉시 편지 한 통을 써서 ‘명마’와 ‘이금’, ‘주례’ 등을 준비해 ‘번성’에 있는 ‘관우’에게 보냈다. 편지는 말놀림이 극히 겸손하고 조신했다. ‘관우’는 읽고 나서 크게 웃으며 사자를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형주’에 남겨두었던 병력을 모두 ‘번성’으로 이동시켰다.


...그 틈을 타서 ‘오(吳)’의 군사들이 봉화대를 침묵시키고 ‘형주’를 차지해 버린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蛇足(사족)을 덧붙이지면, 연의에서는 ‘여몽’을 깎아내리기 위해 위의 계책도 ‘여몽’이 아닌 ‘육손’이 낸 것으로 되어있고, 또한 ‘관우’가 죽은 후 ‘여몽’은 ‘관우’의 혼령에 씌어 비참하게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정사(正史)에 의하면, 위의 계략은 ‘여몽’에 의한 것이었고, ‘여몽’은 단지 병 때문에 죽은 것뿐이었다.

일단은 '소리장도'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여몽’이지만, 이보다 더한 예도 있다.



예문2>


'臥薪嘗膽(와신상담)'이라는 고사의 주인공인 越王(월왕) '구천'의 이야기이다.

때는 춘추시대 말기, 위대한 전략가 ‘손무’와 명장 ‘오자서’의 힘으로 강국 ‘초나라’를 무찌르고 주변나라를 떨게 했던 ‘오(吳)나라'의 왕 ‘합려’는 ‘초’를 치고 난 후, ‘월(越)나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

-> (이 때 ‘손무’는 은퇴한 이후이다).


이에 ‘합려’의 뒤를 이어 ‘오왕(吳王)’이 된 ‘합려’의 손자인 '부차'는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한다. 그리고 ‘합려’의 상이 끝나자 곧 ‘월(越)’을 치기 위해 군사를 움직인다. ‘손무’는 없었지만 명장 ‘오자서’의 힘으로 ‘월나라’는 궤멸적인 타격을 받는다. 이에 ‘월나라’는 ‘오왕’의 측근인 ‘백비’를 매수하여 '월왕‘ 부부가 신하가 되어 ’오나라‘에서 생활하는 것'을 조건으로 멸망은 면하게 된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에 와서 ‘오왕 부차’의 신하로 생활하게 된다.

이때 '마른장작에 누워 쓸개를 빨며' 생활한 것이 '臥薪嘗膽(와신상담)'의 고사가 되었다. ‘오왕 부차’는 신하 ‘범려’와 ‘문종’에 도움으로 그들의 경계를 풀기 위해 그의 배설물까지 먹어가며 고생을 하여 결국엔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물론 ‘오자서’가 반대했지만, 이미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오왕’에겐 충신의 강직한 충언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월왕 구천’은 고국으로 돌아가 즉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복수를 계획한다. 그리고 ‘오왕’에게 많은 보물과 여성 최초에 스파이 교육을 받은 미인인 '서시'를 바친다. '찡그린 얼굴도 그렇게 아름다웠다'는 '西施嚬目(서시빈목)'의 주인공인 ‘서시’를 선물로 받은 ‘오왕 부차’는 점점 더 방탕한 생활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커다란 궁궐의 공사까지도 실행하는데 ‘월왕’은 커다란 목재를 보내 토목공사의 규모를 더 크게 부추겨 ‘오(吳)’의 재정을 파탄 나게 한다.


어느 한 해에 ‘월(越)나라’에 흉년이 들었는데 ‘오(吳)나라’에서 곡식을 꾸기로 했다. 과연 곡식을 빌려줄까 싶었으나 '복수를 꾀하고 있다면 곡식을 빌려달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에 따라 ‘오(吳)’에서는 곡식을 꾸어준다. 


다음 해에 ‘월(越)나라’에는 풍년이 들었으나 ‘오(吳)나라’에서는 흉년이 들었다. ‘월왕 구천’은 이때를 틈타 공격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이 만류한다. ‘월(越)’은 ‘오(吳)’에 빚을 갚는다며 곡식을 보냈는데, 이 때 낱알이 좋은 것만을 골라 살짝 쪄서 보냈다.


이에 ‘吳’에서는 곡식의 품종이 좋은 것을 보고 다음해에 종자로 쓰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찐 씨앗이 자랄 리가 없는 법. ‘吳’에는 그 해에 유래 없는 대흉년을 맞게 되고, 이를 기회로 ‘越’은 ‘吳’를 크게 쳐 무너뜨린다. ‘오왕(吳王) 부차’는 '신하가 되겠다'며 항복을 받아주길 청하지만, ‘월왕(越王)’은 자신이 이미 그렇게 해서 살아남아 복수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인간의 복수심'을 쉽게 보지 않았다. 그러게 ‘吳’는 ‘越’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월왕 구천’은 한 나라의 왕(王)으로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신하가 되고, 온갖 허드렛일을 다하고, 다른 사람의 대변까지 먹으면서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그리고는 그 힘든 날들을 지나며 복수심이 무뎌지게 하지 않기 위해 고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섶에 누워 쓸개를 빠는' 생활을 계속했다. 또한 ‘吳王’의 경계심이 느슨해지게 하기 위해 많은 뇌물을 보내 그 눈을 흐리게 만들었고, 미인 ‘서시’를 보내 정사로부터 관심이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급기야 ‘吳’를 무너뜨리기에 이른다. 이야말로 ‘여몽’의 예보다 훨씬 처절한 '소리장도(笑裏藏刀)'의 예라 할 것이다. 물론 이 예는 '와신상담(臥薪嘗膽)'으로 더 유명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2-5, 제11계 이대도강(李代桃僵): 오얏나무가 복숭아나무를 대신해 죽다.


자두(오얏)나무가 복숭아나무 대신 쓰러지다. 딱히 와 닿지는 않을 테지만, 이는 “중요성이 적은 것을 희생하여 중요성이 큰 것을 살린다.”는 뜻이다.


옛날 중국에서는 복숭아 나무의 병충해가 심해서 그 옆에 오얏 나무를 심어 쓰러뜨리면 병충해가 오얏나무에 집중되어 복숭아나무가 무사히 자랐다고 한다.


“싸움에는 반드시 손해가 따르기 마련이다. 부분적인 손해를 무릅쓰고, 대국적인 이익을 취해야 한다.” [勢必有損,損陰以益陽.]


이것은 이른바 '살을 내주고 상대방의 뼈를 자르는' '肉斬骨斷(육참골단)'과도 뜻이 통한다 할 것이다. 이는 양동작전시의 주력부대가 승리를 차지하기 위해 미끼부대를 버린 돌로 삼는 식의 작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승리를 위해서 작은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간단히는 양동작전시의 미끼부대와 주력부대 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양동부대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예문1>


또 한사람의 '孫子(손자)'로 불리는 전국시대' 제나라'의 '손빈'의 일화이다.

‘손빈’이 ‘위나라’에서 탈출하여 ‘제나라’로 망명한 후 ‘제 위왕’은 ‘손빈’에게 벼슬을 주려 했다. 이에 ‘손빈’은 '자신이 제나라에서 벼슬을 산다는 것이 위나라에 알려지면 ‘방연’이 무슨 간특한 짓을 꾸밀지 모른다.'는 이유로 벼슬을 사양한다.


‘제 위왕’은 여가시간에 종족과 공자들을 거느리고 사냥터에 나가서 내기를 걸고 경주를 하거나 활을 쏘는 것이 취미였다. 그런데 ‘제 위왕’의 종족인 '전기'는 말[馬]이 그다지 좋지 못해서 겨룰 때마다 늘 지기만 했다. 그래서 전기는 ‘제 위왕’에게 늘 막대한 돈을 잃곤 했다.

어느 날 ‘전기’는 ‘손빈’을 데리고 나가 내기를 구경시켰다. 그 날도 ‘전기’는 ‘제 위왕’과 세 번을 겨루어 다 지고야 말았다. 이를 유심히 본 손빈은 ‘전기’에게 말했다.


"그대는 내일 다시 왕과 내기를 하시오. 내 반드시 그대가 이기게 해드리리다."


이에 ‘전기’는 제위왕에게 가서 내기를 청하고, 허락을 받고 돌아와 ‘손빈’에게 계책을 물었다. ‘손빈’이 대답했다.


"왕은 ‘제나라’에서 좋은 말을 다 가지고 계시오. 그대가 순서대로 왕과 겨루다가는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기기 위해서는 다음의 방법을 써야 합니다.


먼저 그대는 가장 좋지 못한 말을 타고 왕의 가장 좋은 말과 경주하십시오.


그리고 대왕이 보통 말을 타시거든 당신은 가장 좋은 말을 타고 경주하십시오.


또 대왕이 가장 좋지 못한 말을 타시거든 당신은 보통 말을 타면 됩니다.


그러면 세 번 내기에서 한 번은 지겠지만, 두 번은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손빈’의 계책에 따라 ‘전기’는 한 번은 지고 두 번은 이겼다. ‘전기’는 그 후에 왕에게 자신이 이긴 것은 ‘손빈’의 계책 덕분이라는 것을 고했다. 이에 ‘제 위왕’은 ‘손빈’을 존경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져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손빈’에게 상을 내렸다.


즉, 작은 것을 내어 주고 더 큰 것을 취하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실전에 작은 전투를 내어 주고 그 방심한 틈을 타, 더 큰 전쟁을 이긴다 것이다.



예문2>


‘완성’에서 전위를 잃고 살아 돌아온 ‘조조’는 또다시 '황제'를 자칭하는 ‘원술’의 토벌에 나섰다. ‘조조’군에 차츰 밀리던 ‘원술’은 식량을 모두 거두어 ‘회수’ 건너로 후퇴했다. 이 해에 커다란 흉년이 들어 양식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17만 조조군은 양식이 부족해 곤란을 겪고 있었다. 이에 ‘조조’는 ‘손책’에게 양곡 10만 섬을 빌려왔다. 하지만 그것으로 병사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양곡관리관의 부하인 창고지기 '왕후'가 들어와 ‘조조’에게 품했다.


"군사는 많고 양식은 적으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작은되로 나누어 주어 우선 급한 불이나 끄면 될 것이다."


"병사들이 원망을 하면 어찌합니까?"


"나에게 생각이 있느니라."


‘왕후’는 명령에 따라 작은되로 병사들에게 양곡을 배급했다. ‘조조’가 암암리에 사람을 보내 살펴보니 모든 병사들이 '승상(조조)이 우리를 속였다'며 불평하고 있었다. ‘조조’는 남몰래 ‘왕후’를 불렀다.


"내 너에게 한 가지 물건을 빌리고자 한다. 그것만 있으면 군사들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으니 너는 인색하게 굴지 말지어다."


"무엇을 빌리려 하시옵니까?"


"너의 머리를 빌려야겠다."


"저는 아무 잘못도 없사옵니다."


"나 역시 너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군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네 식솔들은 모두 책임지고 보살필 것이니 아무 걱정 말라."


‘조조’는 ‘왕후’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대에 매달고 방을 붙였다.


<‘왕후’가 군량을 작은되로 나누어 주며 군량을 착복했으므로 군법에 따라 다스리노라.>...이리하여 ‘조조’에 대한 군사들의 원망은 비로소 해소되었다. 


★. 중국은 몇 천년에 걸쳐 전쟁이 끈임없이 해 왔었다. 장수과 식객들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즉, 군주나 왕이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자신과의 이해 관계가 우선인 경우가 많다. 그럼 일반병들은 더 말할 이유가 없다. 전쟁에서 승리를 하면 전리품과 월급을 받는 것이 충성보다 더 귀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원술’을 무찌름에 있어, ‘조조’는 스스로 앞장서며 칼을 들고 적을 베고, 말에서 내려 흙을 퍼 해자를 메웠다. 이 모습을 본 장수와 군사들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원술’의 본거지인 ‘수춘성’을 함락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역시도 작은 희생으로 큰 승리를 거머쥔 계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승리'란 ‘원술’을 무찌른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병사들을 진정시킨 것을 뜻한다.



2-5 제12계 순수견양(順手牽羊) :기회를 틈타 양을 슬쩍 끌고 간다. 적의 허점을 발견하면 주저없이 이에 편승하라는 뜻이다.


작은 허점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작은 이익이라도 꼭 챙겨야 한다. 적의 작은 허점도 우리의 이익으로 연결된다.” [微隙在所必乘,微利在所必得.少陰,少陽.]


기회를 틈타 양을 끌고 가다. 하지만 이 계략은 문제(?)의 소지가 꽤 많은 계략이다. 적의 작은 허점도 놓치지 말고 공략하여, 아군은 작은 이익이라도 꼭 챙겨야 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상당한 위험부담의 문제가 있다.


상대방의 속임수에 넘어갈 위험이 있는 것이다. 같은 삼십육계 만 보아도...

제6계 '성동격서(동쪽에 소리 내고 서쪽을 친다),

제8계 '암도진창(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창으로 건너가다),

제11계 '이대도강(오얏나무가 복숭아나무 대신 쓰러지다),

제13계 '타초경사(풀을 쳐 뱀을 나오게 하다),

제16계 '욕금고종(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풀어주다),

제17계 '포전인옥(돌을 던져서 구슬을 얻다)


실제 이 '순수견양'은 현대 중국에서 그 유용성에 있어 권장되지 않고 있다. 중국의 成語學者(성어학자)들은 명백히 이 표현을 부정적인 것으로 분류한다. 이쯤 되면 예문을살펴보는 것조차도 상당히 거북해진다.

예를 살펴본다고 해도 작은 허점을 공격해서 성공한 예를 봐야 할지, 작은 허점을 공격했다가 적의 계략에 말려든 예를 봐야 할지도 고민스럽다.



예문>


적벽대전 이후 ‘형주’에 눌러앉은 ‘유비’는 ‘형주’를 반환하라는 ‘吳’의 요청을 완전히 묵살하고 있었다. 이에 ‘吳’의 ‘주유’와 ‘손권’이 이를 갈고 있었는데, 사자로 보냈던 ‘노숙’에게서 '병사들이 모두 상복을 입고 있었고, 喪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주유’가 누가 죽었는지 묻자 ‘유비’의 부인인 ‘감부인’이 죽었다고 했다. 이에 ‘주유’는 계책을 내놓으며 ‘형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한다.


‘유비’는 부인들이 모두 죽었으니 당연히 새장가를 들어야 할 것이다. 이에 ‘주유’는 ‘손권’의 여동생을 미끼로 ‘유비’를 꾀어 죽일 계책을 세운다. 그리고는 ‘유비’에게 사자를 보내 양가가 인척을 맺고 힘을 합쳐 ‘조조’를 무찌르자는 뜻을 전하게 한다.


이에 ‘형주’에서는 ‘제갈량’이 이를 눈치 채고 ‘조운’을 동행하여 ‘유비’를 ‘동오’로 보낸다. 의심을 품고 감히 가지 못하는 ‘유비’였으나 ‘제갈량’이 이미 계책을 세워두었다고 하자 길을 떠난다. 그리고 ‘제갈량’은 ‘조운’을 불러 금낭(비단주머니) 세 개를 주며 순서대로 행하라 이른다. ‘유비’ 일행이 ‘남서’에 도착하자 ‘조운’이 첫 번째 금낭을 열었다. 거기에 쓰인 계책에 따라 병사들에게 지시한다.


그리고는 ‘유비’에게 ‘교국로’를 찾아가 만나라고 여쭈었다. ‘교국로’는 '강동의 이교(‘손책’의 부인 ‘대교’와 ‘주유’의 부인 ‘소교’)'의 아버지였다. ‘유비’는 ‘교국로’를 만나 이번에 ‘동오’로 장가를 들러 왔다는 얘기를 했다.


리고 병사들은 떠들썩하게 혼례용품을 구입하며 ‘유비’가 ‘동오’로 장가들러 왔다는 소문을 계속 퍼뜨렸다. 한편 ‘교국로’는 ‘유비’를 만난 후 ‘오국태’(손권의 이모 ; 손권의 친어머니는 일찍 죽었고 그 이모가 길렀다)를 만나 경사를 축하했다. 이에 ‘오국태’는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하고, ‘교국로’가 ‘유비’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불같이 화를 내며 ‘손권’을 만났다.


"너는 이렇게 나를 무시할 셈이냐?"


"어머니!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분명히 하소서. 무엇 때문에 이리 서러워하시옵니까?"


"사내가 장가들고 계집이 시집가는 것은 고금의 이치이다. 그러나 내가 너의 어미가 되었으니 그런 일은 당연히 나에게 묻고 명을 받아야 할 터인데, 너는 ‘유현덕’을 매제로 삼으려 하면서 어찌 나를 속이느냐?"


‘손권’이 깜짝 놀라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니옵니다. 이는 ‘주유’의 계략이옵니다. ‘형주’를 빼앗기 위해 구실을 내세운 것뿐입니다. ‘유비’를 속여 이곳에 잡아 가두고 그와 ‘형주’를 바꿀 생각이었습니다. 이는 계략이지 진실로 혼사를 맺고자 함이 아니옵니다."


이에 ‘오국태’가 크게 노해 ‘손권’을 꾸짖는다.


"주유는 6군 81현의 대도독으로 있으면서 ‘형주’ 하나 빼앗을 계책이 없어서 나의 딸을 구실로 ‘유비’를 죽이겠다고 하더냐? 그러면 나의 딸은 바로 까막과부가 될 터인데 앞으로 어떻게 다시 시집을 가라고 말하겠느냐? 내 딸의 평생을 그르쳐 놓게 생겼으니 너희들은 참 잘도 했구나!"


이에 ‘교국로’가 '일이 이렇게 되었고, ‘유황숙’은 황실의 종친이니 그를 정말로 사위로 맞아들여 망신을 면하는 게 낫겠다.'며 옆에서 거든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고 ‘손권’이 말하자, ‘유황숙’은 세상의 호걸이니 이는 영매에게도 욕되지 않을 것이라 한다. 이에 ‘오국태’는 자신이 ‘유비’를 만나보고 마음에 들면 사위로 삼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주유’의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다.


이에 ‘손권’은 연회를 준비시키는 한편 병사들을 매복시켜 놓으라. 지시한다. 그리고 ‘유비’를 불렀는데 ‘유비’는 ‘조운’이 이끄는 5백 병사의 보호를 받으며 ‘감로사’에 왔다. ‘손권’은 ‘현덕’의 풍채가 비범한 것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다. ‘오국태’는 ‘현덕’을 보자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사위라 말했다. 갑자기 ‘유비’가 울며 말한다.


"만일 유비를 죽이시려거든 이 자리에서 즉시 죽여주소서!"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가?"


"도처에 도부수들을 숨겨 놓으셨으니 ‘유비’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옵니까?"


이에 ‘오국태’는 크게 노해 ‘손권’을 꾸짖었다.


...그리고는 이래저래 해서 ‘유비’와 ‘손부인’의 혼례가 치러졌다. ‘주유’는 크게 놀랐다. 그리고는 다른 계책을 ‘손권’에게 전했다. 그 계책은 ‘유비’는 가난하게 자라서 풍요로운 생활을 한 적이 없으니 그에게 온갖 사치를 시켜주어 ‘형주’로 돌아갈 생각이 들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이 계략은 제대로 먹혀서 ‘유비’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형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에 ‘조운’은 두 번째 금낭을 열고 계책을 실행한다. ‘유비’를 만나서 ‘형주’가 ‘조조’의 침입을 받고 있으니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유비’에게 말한 것이다. ‘유비’는 돌아가려 하나 ‘동오’에서 순순히 보내줄까 염려했다. 이에 ‘손부인’이 꾀를 내어 설날에 ‘동오’를 빠져나간다. 


하지만 이윽고 ‘손권’의 부하들이 추격해 오자 ‘조운’이 세 번째 금낭을 열었다.

이에 ‘유비’가 ‘손부인’에게 울면서 지금의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자 ‘손부인’은 직접 나서서 자신들을 추격해온 ‘손권’의 부하 장수들을 오히려 꾸짖어서 돌려보낸다. 이에 ‘손권’은 크게 화가 나서 ‘손부인’의 목도 ‘유비’의 목과 함께 가져오라고 명령한다.


‘유비’는 강기슭에 도착하였으나 배가 한 척도 없었다. 그리고 ‘동오’의 군사들은 바로 지척까지 와 있었다. ‘유비’가 이제 죽었구나하고 탄식하는데 갑자기 강기슭에 돛단배 20여척이 일렬로 늘어선다. ‘유비’와 ‘손부인’이 황급히 배에 오르고, ‘조운’도 병사들과 배에 오르자 한 사람이 나와 웃으며 말했다.


"주공! 우선 축하드리옵니다. ‘제갈량’이 여기서 가다린지 이미 오래이옵니다."


배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형주의 수군이었다. ‘제갈량’이 ‘동오’의 병사들을 보고 말했다.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너희들은 돌아가 ‘주랑’에게 다시는 미인계 같은 수단을 쓰지 말라고 전 하여라!"


그리고 돌아가는데 ‘동오’의 병사들이 추격해왔다. 또한 소식을 들은 ‘주유’도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나왔다. 그리고 배가 ‘형주’에 이르자 배에서 내려 추격해갔다. 하지만 이미 ‘형주’에는 ‘관우’, ‘황충’, ‘위연’등이 모두 대기하고 있어서 ‘동오’의 군사는 크게 패하였다. 허둥지둥 달아나는 ‘동오’의 병사들을 보며 병사들이 소리쳐 놀려댔다.


"천하를 안정시키겠다던 ‘주유’의 묘책이, 부인만 얻어 주고 군사마저 잃었구나!" 이는 ‘주유’의 계책을 간파하고 그 허점을 노려서 양(손부인)을 끌고 와 버린 틀림없는 '순수견양'이라 할 것이다.


*. 위 사례에서 연의는 위와 같이 묘사하고 있지만, 실제와는 다르다. 실제로 ‘손권’이 혼인을 청한 것은 나날이 늘어가는 ‘유비’의 인기에 편승해 보고자 했을 따름이며, 따라서 ‘유비’를 죽일 생각 같은 것은 전혀 없었고, ‘동오’행이 위험하다고 말린 것은 소심한 ‘제갈량’이었으며, 그 만류를 뿌리치고 ‘동오’로 간 것이 ‘유비’였다. 위의 이야기는 나관중이 지어낸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3. 공전계(攻戰計):자신을 알고 적을 안 다음 계책을 모의하여 적을 공격하는 전략이다.


공전계란 말 그대로 공세를 취할 때 쓰는 계략이다. 공세를 취한다는 것은 적보다 병력이 우세한 상황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적보다 병력이 적으면서 공세를 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보다 많은 병력으로 상대방을 공격해 들어갈 때 쓰이는 계략들이 이 '攻戰計'에 들어있다.



3-1, 제13계 타초경사(打草驚蛇) : 풀을 헤쳐 뱀을 놀라게 한다.


'풀을 쳐서 뱀을 나오게 하다'. 아리송한 말이지만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일이다. 뱀이 풀 숲에 숨어있고 이 뱀을 잡아야 할 때, 뱀이 나오게 하기 위해서 풀을 친다. 그러면 그 소리에 놀란 뱀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적의 동향이 불확실하면 적을 자극해 실질을 살핀다. 그 후에 행동으로 들어간다. 이의 반복은 숨어있는 적을 발견하기 위한 계략이다.” [疑以叩實,察而後動;復者,陰之媒也.]

간단히 말해서 적을 '떠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문>


春秋時代(춘추시대) 초기, 강국이었던 ‘鄭(정)나라’의 이야기이다.

‘정나라에 군주인 鄭武公(정무공)’의 부인은 ‘강씨’였다. ‘강씨’에겐 소생이 둘 있었는데, 장자의 이름은 ‘寤生(오생)’이고 차자의 이름은 ‘段(단)’이었다. 장자의 이름이 '寤(잠깰 오)'에 '生(날 생)'인 것은 이유가 있었다.


‘강씨’가 장자를 낳을 때 그녀는 잠을 자고 있었다. 꿈에 해산하는 꿈을 꾸었는데, 잠에서 깨어나니 아기가 나와 있던 것이었다. 그래서 이름을 ‘오생’이라 한 것이다. 하지만 ‘강씨’는 이 일을 몹시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 후에 낳은 아들 ‘단(段)’만을 편애했다. 그리고 ‘정무공’에게 ‘단’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정무공’은 長幼(장유)에는 질서가 있는 법이므로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오생’이 세자가 되었다. ‘정무공’은 차자인 ‘단’에게는 ‘共城(공성)’이라는 땅을 주고 ‘단’을 ‘共叔(공숙)’이라고 불렀다. ‘강씨’는 이러한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무공’이 세상을 떠나고 ‘오생’이 즉위했다. 이가 바로 ‘鄭 莊公(정 장공)’이다. 이에 ‘강씨’는 ‘정장공’에게 말한다.


"왜 ‘공숙’을 制邑(제읍)에 봉하지 않느냐?"


"제읍은 험한 곳으로 이름 높은 곳입니다. 선왕께서도 그곳만은 나누어 봉하지 말라는 유언까지 하셨습니다. 이 외의 일이라면 분부대로 거행하리이다."


"그렇다면 ‘京城(경성)’을 주면 어떠하냐?"


‘정장공’은 어이가 없어 말도 하지 못했다. ‘강씨’가 투덜거린다.


"그것도 안 된다면 차라리 ‘공숙’을 다른 나라로 추방하거라, 타국에서 벼슬이나 살면서 입에 풀칠이라도 하라고 해야겠다."


"그럴 것 없습니다. 그저 분부대로 하오리다."


다음날 ‘정장공’은 신하들에게 말했다.


"공숙 단에게 경성을 봉하고자 하노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늘엔 해가 둘일 수 없고, 백성에겐 두 임금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경성’은 땅도 넓고 백성도 많아서 조금도 ‘형양(정나라 수도)’과 다를 바 없습니다. ‘공숙’에게 ‘경성’을 봉한다면 이는 한 나라에 두 임금을 두는 것입니다. 그저 후환이 있을까 두렵사옵니다."


그러나 ‘정장공’은 마침내 ‘공숙’에게 ‘경성’ 땅을 봉했다. ‘공숙’은 형인 ‘정장공’에게 사은숙배하고, 내궁으로 들어가 어머니 ‘강씨’에게 절했다. ‘강씨’는 ‘단’에게 말했다.


"이번에 경성에 가거든, 마땅히 군사를 많이 모아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준비하여야 할 것이다. 네가 군사를 일으키고 내가 여기서 내응하면, 이 나라를 넉넉히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만일 ‘오생’ 대신 이 나라 군위에 오르기만 한다면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모친께서는 아무 염려 마십시오."


이후 ‘공숙’은 ‘경성 太叔(태숙)’이라고 불리었다. ‘태숙’은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사냥을 핑계 삼아 군사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또한 이웃지방을 빼앗곤 했다. 땅을 빼앗긴 ‘관장’이 ‘정장공’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정장공’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때 한 사람이 큰소리로 외쳤다.


"단을 죽여야 합니다."


그는 공자 ‘呂(여)’였다.


"무슨 좋은 의견이라도 있느냐?"


"신이 듣건대 신하된 자는 군사를 둘 수 없나니 군사를 기르는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태숙’이 母后(모후)의 사랑을 믿고, ‘경성’의 견고한 지형을 믿고서 군사를 조련하며 무예를 가르치고 있다 하니 과연 그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바로 군위를 찬탈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공께서는 군사를 ‘경성’으로 보내어 단을 잡아오게 하십시오. 그래야만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정장공’이 대답했다.


"단은 모친이 사랑하는 아들이며, 과인이 사랑하는 동생이다. 차라리 땅을 잃을지언정 어찌 형제의 정을 상하게 할 수 있으리오. 경은 망령된 말을 하지 마라. 과인이 알아서 할 것이다."


공자 ‘여’는 물러나오며 정경 벼슬에 있는 祭足(제족)에게 푸념을 했다. 그러자 제족이 조용히 대답한다.


"주공은 재주와 지혜를 겸전한 분이오. 그러니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지는 않으리 이다. 다만 여러 사람의 이목이 있기 때문에 속내를 밝히지 않으신 것뿐이오. 그대는 귀인이며 주공과 친척간이고 높은 벼슬에 있음이라. 타인이 없을 때 주공을 찾아가 보시오. 반드시 주공께서 뜻을 밝히 시리이다."


그리하여 공자 ‘여’는 다시 ‘정장공’을 찾아갔다. 그제야 ‘정장공’이 입을 연다.


"과인은 이미 계책을 세웠다. 하지만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 아직은 움직일 수가 없구나. 내가 만일 지금 ‘단’을 죽이려 한다면 모친이 반대할 것인 즉, 헛되이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뿐이다. 또한 세상 사람들은 우리 형제가 우애가 없다고 욕할 것이며 나에게 효심이 없다고 할 것이다. 내가 그를 내버려 두는 것은 일을 꾸며 먼저 반역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때에 이르러 죄를 밝혀야 모든 사람들이 내 뜻을 알아줄 것이 아닌가."


"주공께서 앞일을 내다보시는 데는 신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단’의 세력이 손쓸 수 없이 커지면 어찌하옵니까? 그러기 전에 먼저 손을 쓰는 것이 상책일까 하옵니다."


"그러면 어떤 계책을 써야 할꼬?"


"주공께서 오랫동안 周(주)의 조정에 가지 못한 것은 ‘태숙’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안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공은 미리 '주 왕실에 간다.'라는 소문을 내고 떠나십시오. ‘태숙’은 국내에 주공이 없는 틈을 타서 반드시 군사를 일으킬 것입니다. 그때 신이 미리 군사를 거느리고 있다가 경성을 치겠습니다. 주공께서는 周로 가시는 척 하다가 다시 돌아오십시오. 그렇게 하면 쉽게 일이 처리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장공’은 周로 떠났다. 그러자 ‘강씨’는 즉시 사람을 시켜 ‘태숙’에게 밀서를 보냈다. 그러나 이미 공자 ‘여’는 길목마다 사람을 배치하여 밀서를 손에 넣었다. 그 내용을 ‘정장공’에게 보고한 후 다시 봉하여 자신의 부하를 시켜 ‘태숙’에게 전하고 답장을 받아오라 시켰다. 이에 ‘태숙’은 답장을 보냈고, 그 답장을 본 ‘정장공’은 크게 기뻐했다.


"이제야 ‘단’의 죄목과 증거가 생겼다. 이제 그 누가 그를 두둔할 수 있으리오."


그 이후의 일은 공자 ‘여(呂)’의 계책대로였다. 거사가 실패 돌아가자 ‘태숙’은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정장공’은 아우 ‘단’의 시체를 쓰다듬으며 울었다.


"어리석은 동생아! 네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이냐!"


‘태숙’의 시체를 염하는데, 시체의 품속에 아직도 ‘강씨’의 밀서가 있었다. ‘정장공’은 ‘강씨’의 밀서와 ‘태숙’의 답장을 ‘강씨’에게 보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맹세했다. "黃川(황천)에 이르기 전에는 다시 만나지 않겠다."


‘정장공’은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까지 멀리하는 자신의 처지를 탄식했다. 이때 ‘영곡 땅’을 다스리는 ‘영고숙’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정장공’에게 올빼미 몇 마리를 바쳤다.


"이는 무슨 날짐승인가?"


"이 새는 올빼미라고 합니다. 낮이면 태산도 보지 못하면서 밤이면 바늘구멍까지 분별합니다. 곧 조그만 것은 볼 줄 알지만, 큰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올빼미는 어릴 때 어미의 젖을 먹고 자라면서 일단 자라면 그 어미를 쪼아 먹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不孝(불효)한 새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이 새를 잡아먹습니다."


"..."


‘정장공’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때 찐 염소요리가 들어왔다. ‘정장공’은 염소 다리를 ‘영고숙’에게 주었는데 ‘영고숙’은 그 고기를 먹지 않고 살을 골라 소매 속에 넣었다.


"왜 먹지 않고 품에 넣느냐?"


"소신에겐 늙은 어머니가 계십니다. 집안이 가난해서 한 번도 맛난 고기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주공께서 이렇게 맛난 고기를 주셨으나, 소신의 늙은 어머니는 한 번도 이런 음식을 맛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이 고기가 소신의 목에 넘어가겠습니까. 그래서 어머니께 갖다드리려 합니다."


"그대는 어머니를 지극히 봉양하여 사람의 자식 된 도리를 다하는데, 과인은 제후의 지위에 있건만 그대만 못하구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과인은 황천에 가기 전에는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 이제 후회한들 맹세를 돌이킬 수 없구나."


"땅을 파서 샘물이 나거든, 그곳에 지하실을 만드십시오. 그 곳에서 모친을 만나십시오. 그러면 황천에서 만나겠다는 맹세를 지킨 것이 됩니다."


...이리하여 정장공은 ‘강씨’를 만나 효를 다하였고, 영고숙은 대부의 벼슬에 올랐다.


*. 黃川(황천)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흐르는 강'을 말한다. 이에 ‘정장공’이 한 맹세인 '황천에 가기 전에는 만나지 않겠다는 말은 '죽기 전에는 만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이에 영고숙은 이를 문자 그대로 풀어 '지하를 흐르는 누런 강'이라는 뜻으로 해석해 낸 것이다.



3-2, 제14계 차시환혼(借尸還魂) : 죽은 영혼이 다른 시체를 빌려 부활하다.


시체를 빌려 죽은 영혼이 돌아오다. 즉, 유명했던 고인 등의 이름을 이용하여 정통성 내지 계속성의 인상을 주어 명분을 살리라는 뜻이다. 이는 즉, 꼭뚜각시를 명분으로 내세워 실리를 취하는 식의,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명분론'의 문제이다.


“유능한 자는 조종하기 어렵다. 무능한 자는 스스로 도움을 요청해 온다. 그래서 조종하기 쉬운 무능한 자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쪽에서 먼저 나서는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도움을 구해 오는 형세를 이용하는 것이다.”

[有用者,不可借;不能用者,求借.借不能用者而用之,匪我求童蒙,童蒙求我.]



예문>


‘항우와 유방’이 두각을 드러내기 전에 중원을 흔들었던 것은 '진승'과 '오광'이었다. 이들은 보잘것없는 농민출신으로 반진(反秦)의 불씨가 되었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최초에 (농민)반란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구 초(舊 楚: 옛날 초)나라의 명장인 '항연'과 진시황의 장자 '부소'의 이름을 빌렸다.


스스로를 ‘항연’과 ‘부소’라고 하며 사람들을 모았던 것이다. 구초(舊 楚)의 명장 ‘항연’은 ‘항우’의 조부이자 ‘항량’의 부친으로, 전국시대 초나라 말기에 명장으로 이름 높았던 인물이다. 당시 反秦(반진)을 외치는 반군의 대부분은 초나라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구초의 명장 '항연'의 이름은 반진에 불타는 초나라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또 '부소'는 진시황의 큰아들로 ‘조고’와 ‘이사’의 장난이 없었다면 진의 2세 황제가 되어 ‘진’을 안정시킬만한 인물이었다. ‘진시황’과는 달리 유가를 존중하고 인품도 나무랄 데 없어서 백성들로부터의 인기도 높았던 터였다. 둘 다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단지 그 이름에 이끌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진승’과 ‘오광’은 커다란 세력을 이루어 마침내 '항연'과 '부소'의 이름을 버리고 ‘진승’은 스스로 ‘張楚王(장초왕)’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그 이후 ‘진승과 오광’의 세력은 급격히 쇠퇴하여 마침내 ‘진군(秦軍)’에게 토벌당하고 만다.


이후 반란군 중에 떠오른 세력이 '항량'의 세력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반란군이 도적이나 농민 출신이었던 반면에, 구 초나라의 귀족이며 또한 '항연'의 혈통이라는 점이 작용하여 크게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항량’에게 '범증'이 찾아와 아뢴다.


"진승과 오광이 어째서 멸망했는지 아십니까?"


"어째서 멸망했소?"


"그들은 초나라 사람들을 이끌면서도 스스로 장초왕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초나라 사람들은 정통성 있는 왕을 모시길 원합니다. 그러니 그들과 같은 처지가 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신 초회왕의 후손을 찾아 그 분을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항량’은 초나라 마지막 왕인 ‘회왕’의 자손 '심'을 찾아 똑같이 ‘회왕’으로 모신다. 그리고 초나라의 정규군이 된 ‘항량군’은 反秦의 중심에 서게 된다. 물론 ‘초왕’이라고는 하지만 그 실제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항우’가 초의 상장군이 되어 ‘秦’을 무너뜨리고 ‘유방’과 대립하며, ‘회왕’은 '義帝(의제)'로 칭해진다. 하지만 그 후 쓸모가 없어져, ‘항우’에게 제거 당하게 된다.


여기에서 '차시환혼'은 두 번 등장한다. 먼저 ‘진승과 오광’이 ‘항연’과 ‘부소’를 사칭한 것, 그리고 ‘항량과 항우’가 ‘초회왕’을 세운 것이 바로 그것이다. 형태는 다르지만 모두 '차시환혼'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2-3,  제15계 조호리산(調虎離山) : 호랑이를 산 속에서 유인해 낸다.


“상대방을 유인하여 본거지로부터 끌어내서 싸우라는 것이다.”


손자병법에도 이르듯이 본거지에서 적을 지키기는 쉬우나 적의 본거지로 쳐들어가서 이기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주변 환경으로 적을 위태롭게 하고, 나아가 인위적으로 의혹에 빠뜨린다. 정면으로 치고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만, 적이 공격해오는 것을 받아치는 것은 쉽다.” [待天以困之,用人以誘之,往蹇來返.]


‘굳게 지키며 나가 싸우지 않았다.’

즉, ‘굳게 지키고 있는 적을 쳐부수기 위해서는 10배의 군사가 필요하다.’ 는 손자병법의 구절도 있다. 따라서 굳게 지키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는 적을 쳐부수기 위해서는 적을 본거지에서 끌어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예문>


초에 붙은 趙(조)를 치기 위해 한신이 조나라를 향했을 때의 일이다. 조나라를 치기 위해서라 고는 하지만 20만 조군에 비해, 한신은 약 2만의 군사만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는 투항병들을 많이 받아들여 군사가 많았으나, 항상 유방이 군사들을 빼내갔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조나라로 향한 한신은 '정형구'라는 곳에 이르렀다. 이 정형구는 길이 굉장히 좁아서 사람이 2열로 지나가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군사를 가지고 이곳을 지나갈 때 공격을 받는다면 패배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군은 정형구를 지나오는 한신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병사의 수가 압도적이기 때문에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형구를 지나 병사를 정렬한 한신은 밤중에 별동대를 시켜 비밀리에 임무를 주어 보내고, 다음날 남은 병사들을 조나라 성 앞에 흐르고 있는 강물을 등지고 포진했다.('배수(背水)의 진'이다).


이에 조나라 군사들은 코웃음을 쳤다. 배수진은 그야말로 병법의 금기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한신을 '병법도 모르는 풋내기'라고 생각했다.


한신을 풋내기라고 생각한 조군은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만다. '지키는 입장의 유리함'을 버리고 성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전투가 벌어지자 갑자기 조군의 뒤에서 함성소리가 들렸다. 한신이 미리 보내둔 별동대가 조군이 성 밖으로 나간 틈을 타서 성을 장악한 것이었다. 그리고 강을 등에 진 병사들의 필사의 분전 앞에 조군은 무너져 버리고 만다.


항우와 더불어 '배수진'을 활용한 극적인 승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4,  제16계 욕금고종(欲擒故縱):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풀어 준다.


“완전포위로 공격하면 적도 필사적으로 반격한다. 도망칠 수 있게 하면 적의 기세도 줄어든다. 너무 빈틈없이 공각하지 마라. 적의 기세가 줄어들 때 기다렸다가 공격하면 큰 희생 없이 승리할 수 있다. 기다릴 줄 알아야 놓치지 않을 변화가 있다.”

[逼則反兵,走則減勢.緊隨勿迫,累其力氣,消其鬥志,散而後擒,兵不血刃.需,有孚,光.]" 


이는 즉 '막다른 길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는 뜻이다.


孫子兵法(손자병법)에서도 九變(구변) 편에서......

"...포위할 때는 꼭 한 쪽을 비워두어야 한다..." 라고 하고 있다.


도망갈 길이 완전히 막히면 당연히 죽음을 각오하고 반격해 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망갈 곳을 비워두면 적은 도망갈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미리 비워둔 곳으로 적이 도망할 때 공격하면 쉽게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문1>


번성을 공략하던 관우는 여몽의 계략에 빠져 형주를 잃고, 후방을 맡겼던 미방과 부사인의 배반으로 위태로운 처지에 있었다. 관평의 조언에 따라, 그나마 있던 패잔병들을 이끌고 麥城(맥성)으로 들어가 군사들을 주둔시겼다.


그리고는 上庸(상용)에 있는 유봉과 맹달에게 요화를 보내 구원을 청했다. 하지만 유봉과 맹달은 이청을 무시하고, 요화는 분통을 터뜨리며 멀리 성도(촉의 수도)로 가서 유비에게 직접 구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번성에 있던 관우는 구원병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으나 소식은 오지 않고, 성안의 양식도 떨어져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이 때 吳에서 제갈근이 와서 관우에게 항복을 권하나, 관우는 이를 거절한다. 그리고는 제갈근을 죽이려는 관평을 말리고 제갈근을 돌려보낸다.


이에 吳主 손권은 크게 탄식하고, 부하에게 점을 쳐보게 한다. 나온 괘는 地水師卦(지수사괘)였다. 그리고 卦辭(괘사)는 '현무가 나타나니 주작이 멀리 달아난다.'고 하였다. 이에 손권이 관우가 도망치지 않을까 염려하나, 여몽은 크게 웃는다.


"관우는 군사가 적으니 반드시 대로를 따라 도망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맥성 북쪽에 험준한 소로가 하나 있는데, 그 길로 달아날 것이 분명하옵니다. 정예병 5천을 맥성 북쪽 20리쯤에 매복시켜 두었다가 그들을 뒤에서 치게 하면, 그들은 오직 도망칠 마음뿐이니 임저로 달아날 것이 분명하옵니다.


이 때 임저에 정예병 5백을 임저에 숨겨 두었다가 덮치면 관우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군사를 보내 맥성을 포위하되, 북문만은 남겨 두고 그들이 달아나도록 해야겠습니다."


관우는 서천으로 돌아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실지를 회복하라는 조루의 말에 따라 서천으로 탈출할 길을 모색한다. 그러다가 마침 북문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 길로 탈출하려 하나 '왕보'가 말린다.


"소로에는 매복이 있을 터이니 대로로 가셔야 하옵니다."


하지만, 관우는 '매복이 있다 한들 내가 무엇을 겁내겠는가.'라고 하며 북문으로 나선다. 하지만 여몽의 계략대로 매복에 걸려 관우와 관평 부자는 吳軍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손권이 끈질기게 관우에게 항복을 권하지만 관우는 끝끝내 버티다가 아들 관평과 함께 목이 잘리고 만다. 여포를 거쳐 관우가 타던 적토마는 손권이 마충에게 주었으나 며칠 동안 여물을 먹지 않다가 끝내 굶어죽고 말았다.


한편 손권은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차지한 공을 치하하고자 잔치를 벌였다. 손권이 여몽의 공을 치하하며 직접 잔에 술을 따라 여몽에게 주었다. 여몽은 술잔을 받아 마시려 하다가 갑자기 술잔을 집어던지고 손권의 멱살을 조르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파란 눈에 수염 붉은 쥐새끼야! 나를 알아보겠느냐!"

주위의 장수들이 크게 놀라 말리려 하였다. 여몽은 손권을 밀어 넘어뜨리고 성큼성큼 걸어가 손권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나는 황건적을 무찌른 이후 30여 년 동안 천하를 주름잡아 오다가 이제 하루아침에 너희들의 간계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나는 살아서 너의 고기를 씹지 못하고 죽었으니 당장 여가놈(여몽)의 혼을 잡아가겠다. 나는 바로 한수정후 관운장이다."


이에 손권은 크게 놀라, 황망히 좌우를 거느리고 큰 절을 올렸다. 여몽은 땅에 거꾸러지더니 七竅(칠규 : 두 눈, 두 콧구멍, 두 귀, 입의 일곱구멍)로 피를 쏟으며 죽었다.


이렇게 맥성에서 관우를 붙잡은 여몽의 계략이 바로 기본적인 '욕금고종'이라 할 수 있다.



예문2>


북벌을 단행하기 전에 후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남만평정에 나서게 된 제갈량은 그들을 초전에 크게 무찌르고 남만왕 맹획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그를 죽이지 않고 '병사들을 모아 다시 도전하라'며 풀어준다. 이에 주위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라지만, 제갈량은 개의치 않는다. 맹획은 다시 병사들을 모아 도전해 오고, 또 사로잡힌다. 하지만 이번에도 제갈량은 맹획을 풀어준다.


이렇게 잡았다가 풀어주기를 일곱 번. 마침내 맹획은 제갈량의 큰 지혜와 덕에 감복하여 항복한다. 제갈량은 맹획을 죽이고 촉한의 관리를 두기는 쉬운 일이지만, 그렇게 하면 현지인들의 반란이 빈번할 것으로 예상하여 그들을 감화시켜 마음으로부터 복속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렇게 제갈량이 맹획을 일곱번 잡았다가 일곱번 놓아준 것을 '七縱七擒(칠종칠금)'이라 한다. 이것 또한 '욕금고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5, 제17계 포전인옥(抛磚引玉) : 돌을 던져서 구슬을 얻는다.


작은 것을 미끼로 던져, 큰 것을 얻어낸다는 의미이다.


“유사한 것으로 유혹하여, 어리석은 상대방을 친다.” [類以誘之,擊蒙也.]


낚시하는 식으로 미끼를 던져서 그 미끼에 걸려 움직이는 적을 공격하여 보다 큰 승리를 얻어낸다는 의미인 것이다.



예문>


삼국지 중에 가장 큰 전쟁이었던 ‘관도대전’..........

그 관도대전의 서전에서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던 관우는 안량을 단숨에 해치운다. 조조가 관우를 흠모하는 마음은 더욱 커졌다. 승리에 기뻐하고 있던 사이, 급보가 날아든다. 원소군의 2장 중 한 명인 문추가 이미 연진을 점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조는 직접 맞서 싸우러 갔다. 그런데 후군이 전군이 되고, 전군이 후군이 되라는 명령을 전군에 내렸다. 군량바리 등이 앞장서 가고 군사가 뒤쳐져 가라는 것이었다. 여건이 물었다.


"군량바리를 앞세우고 군사가 뒤에 가는 것은 무슨 뜻이옵니까?"


"군량을 뒤에 두면 약탈을 많이 당하기 때문이다."


"만약 적군을 만나 빼앗기면 어찌하옵니까?"


"그 때 가보면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연진을 향해 이동하고 있는 도중, 갑자기 전군에서 함성이 올랐다. 조조는 급히 사람을 시켜 알아보았다.


"문추가 군사를 이끌고 나타나자 우리 군사들은 양초를 모두 버리고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후군이 도착하려면 멀었는데 어찌 하오리까?"


"저리 잠시 피하도록 하자!"


여러 사람들은 모두 급히 언덕으로 올라갔다. 조조는 모든 군사들에게 옷과 갑옷을 벗어던지고 말들도 풀어주라고 했다. 그러자 뭇 장수들이 아뢴다.


"적들이 덮쳐들고 있사옵니다. 빨리 말을 거두어 백마로 후퇴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순유가 황급히 제지하며 말한다.


"이것은 바로 미끼를 던져 적을 유인하는 것인데, 어찌 도리어 후퇴를 하겠소?"


문추의 군사들은 군량과 거장을 빼앗고 또다시 흩어진 말들을 잡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 때 조조는 즉시 군사들에게 언덕을 내려가 일제히 공격하라고 명했다. 문추의 군사는 큰 혼란을 일으켰다. 이렇게 해서 문추는 결국 패배하고 도망쳤다. 그러나 관우에게 결국 죽고 만다.

과거의 병사들은 모두 가난한 농민 출신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식의 계략이 흔히 쓰였다고 한다.


예문2>


마초가 동관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는 마초와 양주 10군벌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다. 마초는 강인한 서량병들을 이끌고 조조를 요격하고자 했으나 조조는 전면전을 피하고 마초의 배후를 치기 위해 위수를 건너려 하고 있었다. 그러자 마초는 조조의 군세가 위수를 도하하려는 찰나 조조의 군영을 덮쳤다.


"뒤편에 백포장군이 쳐들어오고 있사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가 마초라는 것을 알고 앞다투어 배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조조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초가 1백여보 앞까지 왔을 때에야 허저가 급히 조조를 배에 태우고 강을 건넜다. 마초가 도착하여 부하들에게 활을 쏘라고 명령했다. 수많은 화살이 조조가 탄 배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 때 위남현령 정비가 남산 위에서 이 상황을 보고 있다가 급히 영채 안의 소와 말을 모두 밖으로 내몰았다. 서량병들은 이것을 보자 모두 이 소와 말들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조조를 공격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틈에 조조는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장수들이 모이자 조조가 말했다.


"내 오늘 하마터면 조그만 도적놈에게 큰일을 당할 뻔 했소이다."


허저가 말했다.


"만약 누군가가 소와 말을 풀어놓지 않았더라면 도적들은 강을 건너 쫓아왔을 것입니다."


그러자 조조는 소와 말을 풀어놓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어, 정비를 즉시 전군교위로 삼았다.

위에서 살펴본 사례들은 아주 기본적인 '포전인옥'이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재물을 이용하는 것 외에도 미끼부대를 보내서 그 부대를 공격하는 동안 후방을 기습한다거나 하는 식의 응용도 가능하다.


*. 한나라를 세운 유방도 항우의 군사들에게 쫓길 때 가지고 있던 보물들을 길에 뿌려서 병사들의 눈을 돌리게 했다. 게다가 자신의 아이들까지도 집어던졌다고 한다.


*. 유비도 장판에서 도망칠 때, 유방과 같은 행동을 했다..



3-6, 제18계 금적금왕(擒賊擒王) : 적을 잡으려면 우두머리부터 잡는다.


“적의 주력을 부수고 수령을 취하면 그 집단은 무너진다. 이는 용을 땅으로 끌어내는 것과 같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摧其堅,奪其魁,以解其體.龍戰於野,其道窮也.]



예문>


위장(魏將) 등애가 면죽을 함락하고, 제갈첨 부자가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주(後主) 유선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위군은 금방이라도 성도로 들이닥칠 거리까지 와 있었다. 후주(유선)는 급히 문무백관들을 모아 회의를 하나 의견들이 모두 갈팡질팡하여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남만으로 물러나자는 의견, 吳로 망명하자는 의견, 위(魏)에 그냥 항복하자는 의견들이 난립하여 후주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튿날, 후주는 '초주'의 말을 따라 위(魏)에 항복하려 하였다.


그 때 병풍 뒤에서 한 사람이 나오며 '초주'를 크게 꾸짖었다.


"구차하게 살아남으려는 이 썩어빠진 선비 놈아! 어찌 사직에 관한 일을 놓고 터무니없는 말을 늘어놓느냐? 자고로 항복하는 천자가 어디 있더냐!"


후주가 보니 이는 다섯째 아들 '북지왕 劉諶(유심)'이었다. 후주의 일곱 아들 중 오직 유심만이 퐁명하고 영민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나약하고 착하기만 했다. 후주가 '유심'에게 말했다.


"지금 대신들이 모두 항복해야 한다고 하는데, 너는 온 성을 피로 물들일 생각이냐?"


"지난날 선제(유비)께서 살아계실 때 초주가 국정에 간여했사옵니까? 이제 와서 주제넘게 국가대사를 논하면서 입을 열자마자 허튼 소리를 늘어놓으니 온당치 못하옵니다. 신이 보건데 성도에는 아직 수만 명의 군사가 있고, 강유가 거느리는 전군이 모두 검각에 있사옵니다. 만일 위군이 궁궐로 침입하려 한다는 것을 알면 반드시 구원하러 올 터이니 안팎에서 공격하면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옵니다. 어찌 썩어빠진 선비의 말만 듣고 가벼이 선제의 기업을 버리려 하시옵니까?"


그러나 후주는 끝내 유심의 말을 듣지 않고 위군에 항복하기로 하고, 항기를 올린다. 다음날 등애가 이끄는 위군이 몰려와서, 후주 및 문관과 무관들에게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는 검각에 있는 강유에게 귀순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검각에서 이 소식을 들은 강유는 크게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장하의 뭇 장수들은 이 말을 듣자 일제히 피가 거꾸로 치솟아 올라 눈을 부릅뜨고 어금니를 깨문 채 수염과 머리털을 곤두세우고 칼을 뽑아 바윗돌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우리는 죽기로 싸우고 있는데 어째서 먼저 항복한다는 말이냐!"


이에 강유는 군사들을 달래고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낸다.


<여기서 잠시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위군을 이끄는 등애는 강유와 정면대결을 피하기 위해 검각을 지나지 않고 곧장 성도로 가서 後主(유선)에게 항복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금적금왕'이라 할 것이다.>


강유는 즉시 위장 종회에게 항복했다. 종회는 강유를 흠모하고 있었기에 상빈으로 예우했다. 그리고 종회는 즉시 화살을 꺾으며 맹세하고 강유와 의형제를 맺었다. 그 때 위나라 조정에서는 등애와 종회의 공훈처리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이에 종회는 모함받는 등애를 붙잡고, 천하를 향한 야심을 드러냈다. 강유는 종회를 꾀어 촉을 재건할 계획을 세우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천명을 다하고 만다.

그리고 북지왕 유심은 촉의 절개를 보여주기 위해, 아내와 함께 자결한다.


*. 후주(後主) - 촉(蜀)이 유비와 유선, 2대에 그쳤기에 유비는 선주(先主), 유선은 후주(後主)라 부른다.


*. 강유는 원래 위나라의 장수였으나 제갈량에게 감복하여 제갈량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제갈량의 모든 병법을 전수받고, 제갈량의 사후 그의 유지를 이어받아 북벌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강유를 무시하고 항복해버린 '樂不思蜀(낙불사촉)'의 멍청이 유선 때문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천수를 다하고 만다.


*. '樂不思蜀(낙불사촉)' - 魏에 항복한 후주 유선이 사마소가 베푼 연회 자리에서, 사마소가 '서촉 생각이 나지 않소?' 라고 묻자 유선이 '이곳이 너무 즐거워 서촉의 생각은 나지 않나이다'라고 대답한 일에서 유래된 고사.




4. 혼전계(混戰計): '혼전계'는 전투가 시작되어 공방이 혼란스럽게 오고갈때 사용하는 계략이다. 그러기에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닌 뒷공작 등의 계략이 주를 이루고 있다.


“적이 강력해서 정면으로 맞서기 어려울 때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기세를 꺾도록 해야 한다. 우회적으로 접근하여 상대방의 굳건한 기세를 꺾는 것이다.” [不敵其力,而消其勢,兌下乾上之象.]



4-1, 제19계 부저추신(釜低抽薪) : 가마솥 밑에서 장작을 꺼낸다.


여기에서 이르는 '땔감'이라 함은, 여러가지를 뜻한다. 기본적으로 군대의 사기를 뜻하기도 하고, 그 사기의 원천이 되는 그 어떤 것일 수도 있으며, 혹은 군대가 기본적으로 필요한 군량미 등을 뜻할수도 있다. 따라서 "솥밑에서 땔감을 빼낸다."는 의미는 적의 사기를 꺾기 위한 선동이라거나, 군량미 탈취 등의 광범위한 공작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 된다.



예문1> 四面楚歌(사면초가)' 중에서.......


항우와 유방의 마지막 결전전야, 항우가 장수들과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그때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이에 수많은 장병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전의를 잃고 군영에서 탈출하여 전장을 떠나버린다. 이에 항우가 슬퍼하며 고립무원의 처지를 슬퍼하며 그 유명한 노래를 부른다.


力拔山兮氣蓋世(역발산혜 기개세) - 힘은 산을 뽑고, 기세는 세상을 뒤덮는데..

時不利兮騅不逝(시불이혜 추불서) - 때를 잘못만나, 추여! 너마저 가지 않는구나!

騅不逝兮可奈何(추불서혜 가내하) - 추여! 네가 가지 않으니 이를 어찌하리? 어찌하리?

虞兮虞兮奈若何(루혜우혜 내약하) - 우야, 우야! 너를 또 어찌하리?

이 대목이 바로 중국의 대표적인 경극 중 하나인 '覇王別姬(패왕별희)'로 유명한 바로 그 장면이다.


초군을 포위하고 있던 한군에서 흘러나온 초나라 노래가 초나라 장병들의 사기를 꺾어, 다음날 결전에 임해서는 수많은 병사들과, 계포, 종리매 등의 장수들마저 군영을 이탈한 상태였다. 항우를 중심으로 죽음을 불사하고 한군의 포위를 깨부수려던 초나라 군사의 사기를 한군은 이렇게 무너뜨려 버린 것이다.



예문2> '官渡大戰(관도대전)'중에서...


조조는 이 싸움에서 하북의 패자, 원소에 비해 군사적으로 열세에 몰려있었고, 군량도 떨어져 패배를 목전에 두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때 원소의 진영에서 이탈하여 조조에게로 투항한 허유의 계략에 따라 원소군의 군량고였던 '烏巢(오소)'를 습격하여, 일거에 원소군의 군량을 빼앗음으로 하여 관도대전에서 승리하여 중원의 지배자로서의 입장을 굳힌다.


솥의 물을 끓게 하는 것은 아궁이의 땔감이다. 물이 아무리 펄펄 끓고 있어도, 아궁이의 땔감을 빼버리면 더 이상 끓지 못하는 것이다. 물이 끓고 있을때, 찬물을 붓는 것이 아니라, 땔감을 빼는 것.

이것이 바로 '釜底抽薪(부저추신)'의 의미라 할 것이다.



4-2, 제20계 혼수모어(混水摸魚) : 물을 흐려 놓고 고기를 잡는다.


물을 휘저어 물고기를 잡다. 물을 휘저어 물고기를 정신없이 한 후 물고기를 잡는다는 의미이다.

('혼수모어'의 해설을 찾다보면 '흐린 물에서 물고기를 잡는다'로 해석된 글도 찾아볼 수 있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왜냐하면 '혼수모어'는 '물이 흐린' 상태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물을 휘저어' 물고기를 잡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내부 혼란에 편승하여 전력이 약화되고, 지휘가 흩어진 것을 이용한다. 이는 저녁이 되면 누구나 집에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자 하는 것과 같은 심정을 조작하는 것이다.”

[乘其陰亂,利其弱而無主,隨,以向晦入宴息.]


상대방의 내부 갈등을 격화시키거나 약점을 부채질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 그 지도자로 하여금 오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 오판을 기화로 승리를 쟁취하는 전략임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문>


제갈량은 그 유명한 '출사표'를 던지고 북벌에 나선다. 노장 조운과 장포, 관흥 등의 활약으로 북을 향하여 진격하던 중, 천수(天水)에서 姜維(강유)를 만나 고전하게 된다. 제갈량은 강유가 천하의 기재임을 알아보고는 그를 얻기 위해 계략을 꾸민다.


먼저 강유의 어머니가 기현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된 제갈량은 위연을 시켜 기현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는 '강유가 오면 그냥 들여보내주라'는 명을 내린다. 한편, 촉군이 기현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강유는 어머니가 걱정되어 한 무리의 군사를 이끌고 기현으로 향한다. 강유와 마주친 위연은 몇 합 싸우다가 패한 체하며 물러났다. 강유는 곧바로 기성(기현)으로 들어가 성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제갈량은 다시 사로잡은 하후무를 불러다가 말했다.


"지금 강유가 기성을 지키고 있는데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왔다. 부마(하후무)만 보내주면 항복하겠다는 내용이다. 내가 너의 목숨을 살려줄 터이니, 너는 강유를 귀순시킬 수 있겠느냐?"


그러자 하후무는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제갈량이 내어준 말을 타고 영채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길을 몰라 달아나지 못하고 있던 차에, 많은 사람들이 도망쳐오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하후무가 묻자, 그들이 대답했다.


"우리는 기현 백성들이옵니다. 지금 강유는 제갈량에게 성을 바치며 항복했고, 촉장 위연은 불을 지르며 약탈을 하고 있사옵니다. 우리는 그 때문에 집을 버리고 상규로 도망쳐 가는 길이오."


"천수군은 누가 지키고 있느냐?"


"천수성 안에 있는 마태수(마준)이옵니다."


이 말을 듣고 하후무는 천수로 향했다. 또다시 많은 백성들이 도망쳐 오고 있었다. 그들의 말 역시 한결같았다. 천수에 도착한 하후무는 마준에게 강유의 일을 자세히 설명하고, 백성들이 하던 말도 자세히 전했다. 마준이 한탄하며 말했다.


"강유가 배반하고 촉에 귀순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사옵니다."


그러자 좌우에서 말했다.


"그는 도독을 구하려고 그런 말을 하고 거짓 항복했을 것이옵니다."


하후무가 말했다.


"지금 강유가 이미 항복했는데 어찌 거짓이라 하는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촉군이 몰려와 성을 공격했다. 어른거리는 불빛 속에서 강유가 창을 든 채 성 밑에서 외쳤다.


"하후도독은 대답하시오!"


하후무와 마준 등은 모두 성위로 나와 보았다.


"나는 도독을 위해 항복했는데, 도독은 어째서 앞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소?"


"너는 위(魏)의 은혜를 입고 있으면서 무엇 때문에 촉에 항복했느냐? 무슨 약속을 했다는 것이냐?"


"너는 나에게 촉에 항복하라고 편지를 보내놓고 무슨 소리를 하느냐? 네가 빠져나가려고 나를 끌어들였구나! 나는 촉에 항복하여 상장(上將)이 되었다. 어찌 다시 위로 돌아가겠느냐!"


말을 마치자 강유는 촉군을 이끌고 성을 공격하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물러갔다. 이 강유는 제갈량이 보낸 가짜였다. 밤이 어두워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한편, 제갈량은 군사를 이끌고 와서 기성을 공격했다. 기성에서는 식량이 부족해 군사들이 굶주리고 있었다. 이에 강유가 성 위에서 바라보니, 위연의 부대가 군량을 수송하고 있었다. 강유는 군사를 이끌고 곧장 군량수레를 기습했다.


군량을 빼앗은 강유가 성으로 돌아오려 하는데, 갑자기 장익의 군사가 길을 막아섰다. 두 장수가 싸우고 있는데, 왕평의 군사가 몰려나와 강유를 협공했다. 이에 강유는 기성으로 도망쳐 왔다. 그러나 이미 성 위에는 촉군의 깃발이 꽂혀 있었다. 이미 위연이 성을 점거해 버린 것이었다. 할 수 없이 강유는 천수성으로 도망쳤다.


필마단기로 천수성 앞에 이른 강유는 성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이에 마준은 "강유가 온 것은 우리를 속여 성을 빼앗으려는 것이다"라며 강유에게 화살을 퍼붓게 했다. 촉군은 이미 저만치까지 강유를 쫓아와 있었다. 할 수 없이 강유는 상규성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상규성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말을 돌려 다시 달아나는데, 갑자기 수천의 군사들이 나와 길을 막았다. 제갈량이 나타났다.


"백약! 이렇게 되었는데 왜 아직 항복하지 않는가?"


이에 강유는 말에서 내려 항복했다. 제갈량이 강유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는 초려에서 나온 이후 평생 배운 것을 전수하고자 두루 훌륭한 인재를 찾았으나 한스럽게도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했는데, 이제 백약을 만났으니 나의 원이 이루어졌네."


이렇게 제갈량은 가짜 강유와 백성들을 이용해서 마준, 하후무 등을 '휘저어 놓아' 강유를 귀순시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경우를 '혼수모어'의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3, 제21계 금선탈각(金蟬脫殼) : 매미가 허물을 벗듯 위기를 모면하다.


겉으로는 아무 변화도 없는 것처럼 보여서 적으로 하여금 감히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고, 그 뒤로 군사를 빼내 도망치거나 다른 곳에 군사를 사용하는 것이다.


“진지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기세도 줄이지 않아야, 우군의 의심을 막고 적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이동을 숨기고 적을 오판하게 한다.”[存其形,完其勢;友不疑,敵不動.巽而止蠱.]



예문>


위(魏)를 치기 위해 마지막으로 오장원(五丈原)에 둔치고 결전을 위해 사마의를 계속 도발하던 공명은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고,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뜨게 될 것을 예감한다. 그리하여 공명은 자신의 사후처리를 준비하여 일체의 대사는 '양의'에게 맡기고, 군사에 관한 것은 '백약(강유)'에게 맡겼다. 그리고 '위연'에 대한 대비책도...


한편 대치하던 위군의 하후패는 군사를 이끌고 오장원으로 와보니 촉군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급히 돌아가 사마의에게 보고했다.


"촉군은 모두 물러갔사옵니다."


"제갈량이 정말 죽었구나! 빨리 추격해야겠다."


"도독께서 가벼이 추격하셔서는 아니되옵니다. 편장에게 먼저 가보게 하소서."


"아니다. 이번에는 내가 직접 가봐야겠다."


끝내 군사를 이끌고 두 아들(사마사와 사마소)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오장원으로 달려나와 촉군 영채로 돌진했다. 과연 한 사람도 없었다. 사마의는 두 아들에게 뒤를 따르도록 하고는 먼저 군사를 이끌고 촉군을 쫓아갔다.


산 밑으로 가다보니 멀지 않은 곳에 촉군이 보였다. 그래서 사마의는 기세 좋게 쫓아갔다. 갑자기 산 뒤편에서 쿵하는 포소리가 들리고, 함성이 크게 올랐다. 물러가던 촉군이 갑자기 뒤돌아 달려들며 깃발을 흔들고 북을 쳐댔다. 숲 사이로 큰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는데, 깃폭에는 한승상무후제갈량(漢丞相武侯諸葛亮)이라고 쓰여 있었다.


사마의의 낯빛이 흑색으로 변했다. 두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니 중군의 상장 수십명이 사륜거를 에워싸고 나왔는데, 수레 위에는 제갈량이 단정히 앉아있었다. 사마의가 소스라치게 놀라 말했다.


"제갈량이 아직 살아 있구나! 내가 그의 계략에 말려들어 너무 깊이 쫓아왔다!"


위군은 혼비백산하여 뿔뿔이 흩어졌다.


사마의는 50여리를 한달음에 달아났다. 겨우 진정시키고 군사를 정비하여, 제갈량이 정말 죽었고 수레 위에 앉아있던 것은 제갈량의 조각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속은 것을 안 사마의는 곧 촉군을 추격하려 하였으나 이미 촉군은 멀리 물러난 후였다.

그리하여 저 유명한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사마의)를 도망치게 했다(死諸葛走生仲達)'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났다...'고 한다.


제갈량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 위군으로 하여금 경계하게 하고, 그 틈을 타서 군사를 이동시킨다. 이것이 바로 '금선탈각'이라 할 것이다.




4-4, 제22계 관문착적(關門捉賊) : 문을 잠그고 도적을 잡는다.


적이 도망갈 곳을 막아두고 적을 완전섬멸한다는 의미이다. 살려두어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사용되는 계략이다. 하지만 이러한 '완전포위'의 개념은 앞에서 본 '욕금고종(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풀어주다)' 등의 계략과도 상충된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듯이, 적의 도망칠 곳을 열어주어 적의 신경을 도망칠 곳으로 끈 다음, 도망치려는 적을 공격하는 식의 계략이 앞서 나온 '욕금고종' 이었다. 그리고 이는 손자병법에서도 논파하고 있는 바와 같다.


"약소한 적은 포위해서 섬멸한다. 다만 궁지에 몰린 적은 필사적으로 반항하기 때문에 지나친 추격은 피한다." [小敵困之.剝,不利有攸往.]



예문>


사마의에게 가로막혀 번번히 북벌이 좌절당한 제갈량은 사마의를 죽이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리하여 상방곡(호로곡)에 영채를 치고 사마의를 유인했다. 사마의는 기산을 촉군의 본거지로 보고 그곳을 공격하는척 한후, 군사들이 나오면 상방곡의 군량을 습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상방곡에는 위연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곳에 사마의가 오자 위연은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한채하며 물러났다. 위연은 군사를 이끌고 골짜기 안으로 물러나 들어갔다. 사마의는 사람을 시켜 골짜기 안을 탐색해 보게 했다.


"골짜기 안에는 복병이 하나도 없고, 산꼭대기마다 모두 초막이 있사옵니다."


"그것은 분명히 군량을 쌓아둔 것일게다."


사마의는 즉시 군사를 이끌고 골짜기 안으로 들어왔다. 사마의가 얼핏 보니 초막 위에는 모두 마른 나무와 풀이고, 위연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사마의는 문득 의심이 들었다.


"만약 적군이 골짜기 어귀를 막는다면 어떻게 하느냐?"


미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함성이 울리며 산 위에서 불다발이 떨어졌다. 이로 인해 골짜기 안은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위군은 달아나려 해도 길이 없었다. 산 위에서는 불화살이 쏟아져 내리고 지뢰가 일제히 폭발했다. 초막 안 마른 나무에 모두 불이 붙어 불꽃은 무서운 소리를 내며 하늘 높이 치솟았다. 사마의는 놀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말에서 내려 통곡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한참 울고 있는데 갑자기 바람이 미친듯 불어닥치며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골짜기의 불을 모두 꺼버렸다. 지뢰도 터지지 않고 화기도 힘을 잃었다. 사마의는 가까스로 살아나 도망쳤다.


제갈량은 '포전인옥'으로 사마의가 가짜 군량을 노리게 하고, 함정에 빠뜨려 '관문착적'으로 섬멸하려 한 것이다. 이렇게 제갈량은 출구를 막아두고 또한 반격을 당할 우려조차 없는 상태로 만들어 사마의를 없애려고 하였으나 소나기가 내려 사마의를 또다시 놓치고...결국엔 사마의에 가로막혀 북벌을 완수하지 못하고 천명을 다하게 된다.


퇴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반격의 우려조차 없게한 상황에서 완전한 섬멸전을 펼친 제갈량. 소나기라는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나지만 않았다면 삼국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고시(古詩)는 전하고 있다.


*. 상방곡(호로곡)의 지형에 대해 최근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실제로 좁은 계곡에 큰 불을 내면 주위의 수분이 상승해 소나기를 내리게 된다고 한다. 한여름 폭염에 증발한 수분이 소나기가 되어 내리는 것과 같은 원리로....

지금에 과학 상식으로는 이해되었지만, 그 당시에 천문과 지리에 능통하다는 제갈량도 몰랐던 모양이다...




4-5, 제23계 원교근공(遠交近攻) : 먼 나라와 사귀고 이웃나라를 공격한다.


이 원교근공의 전략은 秦始皇(진시황)의 외교 전략으로도 유명한 외교 전략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을 할 때 사용한 방법이기도 하다. 멀리 당나라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신라와 가까운 백제부터 당과 연합을 하여 멸하게 하고, 그리고 요동 쪽으로는 당나라가.. 한강 쪽에서는 신라가 고구리를 공격하여 멸하게 한 것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혼란 중에 지리적 제약까지 있을 경우, 가까운 것부터 손에 넣는 것이 좋다. 멀리 있는 것부터 치면 해로울 뿐이다. 이념이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도 지리적 조건을 중요시해야 한다.” [形禁勢格,利從近取,害以遠隔.上火下澤.]



예문>


이는 전국시대 말기, 秦(진)나라에 망명해와 승상이 된 范雎(범저)가 제안한 외교 전략을 당시 진소양왕에게 올린 전략이었다.


"신이 듣건대 지금 승상 양후 위염이 한나라와 손을 잡고 위나라 건너편에 있는 제나라를 칠 것이라고 하니 그것부터가 잘못입니다. 제나라는 진나라와 너무 먼 거리에 있습니다. 더구나 그 사이엔 한나라와 위나라가 있습니다. 약간의 군사를 보내보았자 제나라는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다고 많은 군사를 보냈다가는 진나라만 손해를 입게 됩니다.


지난날에 위나라가 조나라 건너편에 있는 중산국을 쳐서 그 땅을 차지하긴 했으나 결국엔 조나라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중산국은 지리적으로 조나라와 가깝고, 위나라와 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왕께서 제나라를 쳤다가 이기지 못하면 망신만 당합니다. 설령 이긴다 하더라도 결국 한나라와 위나라만 이익을 보게 됩니다. 그런 바에야 진나라에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신은 대왕을 위해 다음과 같은 계책을 주장합니다. 대왕께선 먼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부터 치십시오. 곧 먼 나라와 친교를 맺음으로써 그들을 이간시키는 동시에 가까운 나라를 쳐서 영토부터 넓혀야 합니다. 누에가 뽕잎을 먹어 들어가듯 가까운 나라부터 쳐서 점점 먼 나라까지 이른다면 천하를 얻기에 무슨 어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이에 진소양왕이 묻는다.


"그럼 먼 나라와 친교하고 가까운 나라부터 치려면 어떻게 해야 좋겠소?"


범저가 아뢴다.


"진나라가 친교 해야할 먼 나라는 바로 제나라와 초나라입니다. 그리고 먼저 공격해야 할 가까운 나라는 한나라와 위나라입니다. 대왕께서 한나라와 위나라를 정복해서 손아귀에 넣기만 하면, 제나라와 초나라가 어찌 혼자서 버틸 수 있겠습니까?"


이후 범저는 객경이 되었다가 진나라의 승상 자리에 앉게 된다. 그리고 진나라는 범저의 원교근공 전략에, 후에 상앙의 부국강병책 등으로 중원에서 제일 강한 나라가 되고, 결국엔 열국이 난립하던 중국을 하나로 통일하기에 이른다.


이 원교근공은 '보편적'인 전략이라고 볼 수는 없다. 가까이 있는 '敵'을 쳐서 없애야만 할 때 사용하는 전략이지, 평상시에 사용할 전략은 아닌 것이다. 이는 秦나라가 중국을 모두 차지할 생각이 있었기에 사용했고, 또한 유효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4-6, 제24계 가도벌괵(假途伐虢) : 기회를 빌미로 세력을 확장시킨다.


春秋時代(춘추시대)에 晉獻公(진헌공)이 晉나라와 인접해 있는 괵나라와 우나라 때문에 골치를 앓다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쓴 계략이다.


“적과 아군의 두 나라 사이에 위치하는 약소국에 대해 만약에 적이 진출하면 우리도 구원을 명분으로 진출하여 차지한다. 약소국의 곤경에 말만 있고 행동이 없다면 신뢰하지 않는다.” 

[兩大之間,敵脅以從,我假以勢.困,有言不信.]



예문1>


진헌공이 인접한 ‘괵나라’와 ‘우나라’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었다. 하지만 진헌공이 ‘괵’을 치려하면 ‘우’가 와서 ‘괵’에 가세하고, 또 ‘우’를 치려하면 ‘괵’이 와서 가세하는 바람에 쉽게 해결을 낼 수가 없었다.


‘우나라’와 ‘괵나라’의 관계를 가리켜 '脣亡齒寒(순망치한)'의 입술과 이의 관계로 흔히 일컬어 왔을 정도였다.


한번은 ‘괵나라’가 또 ‘진나라’의 남방에 침범해 왔다. 진헌공이 대부 ‘순식’에게 상의한다.


"괵을 쳐야 할까?"


"우와 괵은 서로 친한 사이입니다. 우리가 ‘괵’을 치면 ‘우’는 반드시 ‘괵’을 돕습니다. 우리가 만일 군사를 옮겨 ‘우’를 치면 이번엔 ‘괵’이 반드시 ‘우’를 도울 것입니다. 신은 두 나라와 싸워 이겼다는 나라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대책을 논의하던 중에 순식이 아뢴다.


"신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처음엔 ‘괵’을 굴복시키고 다음엔 ‘우’를 굴복시켜 두 나라를 모두 주공께 바치겠습니다."


"그런 좋은 계책이 있다면 속히 말하오."


"우와 괵 두 나라 사이를 떼어놓아야 합니다. 주공은 많은 뇌물을 ‘우나라’에 보내시고 잠시 길을 빌려[가도] 괵나라를 치십시오[벌괵]."


그리하여 ‘우공’이 탐내하는 좋은 구슬과 말을 가지고 ‘순식’이 ‘우나라’에 갔다. ‘우공’은 처음에 ‘괵나라’를 치려는 것을 알고 분기충천했으나, 구슬과 말을 보고 태도가 바뀌었다. 또한 ‘괵’을 친 후에 ‘괵’에서 노획한 물건을 모두 바치겠다는 얘기를 듣고 또한 크게 기뻐했다.


이에 ‘우공’의 곁에 있던 ‘궁지기’가 간한다.


"주공께서는 ‘진나라’의 청을 승낙하지 마십시오. 속담에 이르기를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脣亡齒寒)'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나라’가 우리 ‘우’와 ‘괵’에 손을 쓰지 못한 것은 우리 ‘우’와 ‘괵’이 입술과 이처럼 서로 돕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괵’이 망하면 그 다음은 우리 ‘우나라’의 차례이옵니다."


그러나 ‘우공’은 ‘궁지기’의 말을 듣지 않고 ‘진나라’에 길을 내주었다.

이에 ‘진헌공’은 ‘이극’을 대장으로 삼고, ‘순식’을 부장으로 삼아 ‘우나라’를 지나 ‘괵나라’를 쳤다. 그리고 ‘괵나라’를 친 후에는 ‘괵나라’ 창고에 있는 보물의 10분의 3과 아름다운 궁녀들을 ‘우공’에게 바쳤다. ‘우공’은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는 ‘우나라’를 찾아온 ‘진헌공’과 함께 사냥을 했다. 사냥을 하던 도중 성안에서 연기가 피어올라 보니 ‘진나라’의 군사들이 도성을 점령해 버린 이후였다. 이에 ‘우공’은 ‘진헌공’에게 길을 빌려주고 결국 나라까지 넘겨주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도벌괵'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기게 된 배경이다.



예문2>


유비는 적벽대전 이후 뻔뻔스럽게도 형주에 눌러앉아 도무지 오나라에 형주를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에 주유는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았으나 제갈량에게 번번히 당하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주유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숙을 보내 유비에게 형주를 돌려줄 것을 재촉했다.


하루는 노숙이 형주에 와서 형주반환 문제를 얘기하고 있는데 유비가 갑자기 크게 울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노숙이 이유를 묻자 제갈량이 대답한다. 유비가 형주를 빌릴 때 서천을 차지하면 돌려주겠다고 하였지만, 서천의 주인은 유비와 종친인 유장이므로, 종친을 차마 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형주를 돌려주면 마땅히 갈 곳도 없어서 그렇다고 했다.


이에 노숙이 주유에게 가서 아뢰자, 주유가 말한다.


"공은 다시 형주로 가서 유비에게 '손씨와 유씨 양 가문이 혼사를 맺었으니 바로 한 집안이옵니다. 만약 유씨로서 차마 서천을 빼앗을 수 없다면, 우리 동오(東吳)가 군사를 이끌고 가서 서천을 빼앗아 결혼 지참금 삼아 드릴 터이니 바로 형주를 돌려달라'고 하시오."


이에 노숙이 형주에 와서 말을 전했다. 제갈량이 감사를 표하자 노숙은 돌아갔다. 노숙이 돌아간 후로 제갈량이 크게 웃으며 유비에게 말했다.


"이는 바로 '가도멸괵지계'이옵니다. 서천을 빼앗겠다는 명분으로 실은 형주를 빼앗으려는 것이옵니다. 주공께서는 안심하시고 보고만 계시옵소서."


이렇게 제갈량은 주유의 '가도멸괵지계'를 꿰뚫어 보고 오히려 주유의 계략을 비웃어 주어 결국 주유로 하여금 금창이 터져 죽음에 이르게 했다.


여기에서 주유가 쓰려던 계략도 바로 '가도멸괵'이다. 하지만 주유가 쓰려던 것은 반쪽짜리 계략이라 할 수 있다. 실제 '가도멸괵'은 ‘괵’과 순망의 관계에 있던 ‘우나라’로부터 길을 빌려 '괵'을 친 후, 다시 '우'를 치는 계략이었다. 이에 반해 주유의 계략은 단지 길을 빌린다는 핑계로 바로 형주만을 치려는 계략이었기 때문이다




5. 병전계(幷戰計):병전계란 곧, '함께 싸울 때의 계략'이라는 뜻이다. 즉, 연합전선이나 동맹작전을 펴고 있을 때의 계략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이 '병전계'의 계략들이 '힘을 모아 공동의 적을 치는' 계략뿐만이 아니라, '연합의 주도권을 쥐고 자신의 뜻대로 동맹군을 움직이게 하는' 계략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계략의 상대방이 '공동의 적' 뿐만이 아니라 연합전선을 펼치고 있는 '동맹군'도 계략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5-1, 제25계 투량환주(偸梁換柱) : 대들보를 훔치고 기둥을 빼낸다.


대들보를 훔치고 기둥을 바꿔넣는다. 이는 적(혹은 동맹군)의 중요요직을 우리편으로 갈아치우고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략이다. 이 계략은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적 뿐만이 아니라 동맹국에게도 적용된다.


“적의 진용을 빈번히 달라지게 하고 그 주력을 여기저기 이동시켜 흩어지게 만든다. 이에 편승해 우리가 차지한다. 바퀴를 장악하면 운행을 좌우할 수 있다.” [頻更其陣,抽其勁旅,待其自敗,而後乘之.曳其輪也.]



예문1>


흔히 戰國時代(전국시대)로의 돌입이라 일컫는 三晉(삼진)의 분열. 즉, 晉나라가 韓(한), 魏(위), 趙(조) 세나라로 분열되는 사건의 前 이야기이다.


이 당시의 진나라는 智(지)씨, 韓(한)씨, 魏(위)씨, 趙(조)씨가 국권을 좌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엔 진나라의 땅을 4가문에서 나눠갖고야 말았다. 이에 임금인 晉出公(진출공)은 제나라와 노나라에 밀사를 보내 무도한 4家를 쳐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이는 지씨 일족의 우두머리인 智伯(지백)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에 지백은 4가를 이끌고 진출공을 쳤다. 진출공은 제나라로 달아나고, 지백은 晉哀公(진애공)을 세운다. 이때부터 진나라의 국권은 지백이 장악하게 된다.


지백은 아예 진나라를 혼자서 독식하기 위해 남은 3가를 치기로 했다. 그리하여 당시 크게 일어나고 있는 월나라를 친다는 명목으로 3가에 100리씩의 땅을 군자금으로 내놓게 했다. 한씨와 위씨는 아니꼽지만 땅을 내주었다. 하지만 조씨 일족의 우두머리인 조양자는 땅을 내놓지 않았다. 이에 지백은 조씨를 쳐, 그 땅을 나눠갖기로 하고 한씨와 위씨를 끌어들여 조양자를 쳤다.


조양자는 진양성으로 들어가 굳게 문을 닫아걸고 3가와 맞섰다. 진양성을 포위한지 1년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자 지백은 조바심이 났다. 그래서 진양성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진양성을 격파할 계책을 세웠다. 그것은 바로 水攻策(수공책)이었다. 근처의 水原인 龍山(용산)에 저수지를 만들어 물이 다 차거든 진양성 쪽으로 흘려보내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수공책은 계획대로 진행되어 진양성은 결국 물에 잠기고 만다. 이에 조양자가 크게 탄식한다. 그러자 장맹담이 계책을 올린다. 그리고 그날 밤을 타서 장맹담은 성을 빠져나간다. 장맹담이 간 곳은 한씨 일족의 우두머리인 한강자의 막사였다. 장맹담은 한강자를 설득한다.


"조씨는 지백에게 아무 죄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백은 자기 힘만 믿고서 한씨와 위씨를 동원하여 조씨를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장차 조씨가 망하면 그 다음엔 어떻겠습니까? 한씨와 위씨도 반드시 조씨와 같은 불행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지백은 조씨를 쳐서 땅을 나누어 갖자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백이 어떤 사람입니까? 이미 한씨와 위씨로부터 사방 100리의 땅을 빼앗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런 자가 조씨의 땅을 빼앗아 나누어 주겠습니까? 조씨가 망하면 지백만 더 강해지게 됩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소? 그대의 의견을 들려주오!"


"제 소견으로는 한씨와 위씨가 저의 주인과 손을 잡으시고 도리어 지백을 쳐서 그 땅을 나누어 갖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지씨의 땅은 조씨의 땅보다도 배나 더 큽니다..."


이에 한강자는 조씨와 손을 잡고, 장맹담은 위씨 일족의 우두머리인 위환자도 같은 방법으로 설득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씨와 위씨의 군사들은 저수지의 물길을 지씨의 군영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리고는 우왕좌왕하는 지백을 조양자가 사로잡았다. 그리고는 지씨 일족을 멸족하고, 땅을 똑같이 셋으로 나눠가졌다. 하지만 진애공에게는 조금의 땅도 바치지 않았다.


이후 한, 위, 조, 세 가문은 스스로 삼진(三晉)을 칭했다. 그리고는 천자국인 주나라 위열왕에게서 제후로 봉해지고, 각기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가게 되는 계기가 된다.


한 편, 이 때 서쪽의 秦(진)나라는 晉(진)나라를 버리고 楚(초)나라에 붙고, 중국(中國: 관중의 동쪽지역 부터 산동성 까지)과의 거래를 끊었다. 중국에 속한 나라들은 진(秦)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로 대했다.


여기에서 대들보, 기둥은 굳이 사람에 국한된 것은 아니라 할 것이다. 군대 운영의 근간이 되는 전략이나 전술도 대들보나 기둥으로 보고 바꿔넣을 수 있는 것이다.



예문2>


전국시대 말기에 연횡, 합종으로 위세를 떨친 ‘소진’과 ‘장의’의 이야기이다.

소진은 일찍이 스승의 곁을 떠나 조나라에서 정승이 되어 있었다. 당시 秦(진)나라의 세력이 자꾸만 커져서 중원의 6국이 모두 긴장상태에 있었다.


이에 소진은 6국을 합종시킬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秦나라가 조나라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러고 있던 차에 동문수학하던 장의가 소진을 찾아온다. 소진은 장의를 푸대접해서 쫓아낸다. 이에 장의는 秦나라로 갔다. 그리고는 마침내 秦나라에서 벼슬을 살게 된다. 장의가 벼슬을 하게 된 뒤에는 이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장의에게 말한다.


"...제 주인은 조나라 정승 소진대감입니다. 소정승은 장차 육국을 합종시켜 秦나라를 견제할 작정입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秦나라가 조나라를 칠 예정이라고 합니다. 지금과 같은 시기에 조나라가 무너지게 되면 중원은 진나라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소정승께서는 저로 하여금 선생을 진나라에서 정권에 참여하도록 뒤를 봐주신 것입니다. 또한 선생께서 조나라의 작은 벼슬에 안주할까봐 그렇게 괄시해서 쫓아낸 것입니다."

이에 장의는 크게 탄식한다.


"허허. 내가 지금까지 소진의 계책에 빠져 있었구려. 참으로 소진은 나보다 그 재주가 월등하오. 그대는 돌아가거든 소진에게 전하시오. 진나라가 조나라를 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이오. 내 어찌 소진의 은혜를 저버릴 수 있으리오."


이렇게 소진은 진나라의 중역에 자기 사람을 넣음으로 해서 진나라의 조나라 침공계획을 무산시켜 버렸다.

이도 또한 '투량환주'라 할 것이다.




5-2. 제26계 지상매괴(指桑罵槐) : 뽕나무를 가리키며 홰나무를 욕한다.


이는 상대방에 대해서 직접적인 비난이 곤란할 경우, 제3자를 비난하는 듯하게 하여 간접적으로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을 뜻한다.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복종하게 하려면 경고의 방법을 써야 한다. 단호한 가운데 복종을 이끌어 내고, 과감하게 행동해서 심복시킨다.” [大凌小者,警以誘之.剛中而應,行險而順.]



예문>


功戰計(공전계) 중의 打草驚蛇(타초경사)를 설명하면서 등장했던 ‘鄭莊公(정장공)’의 이야기이다. '타초경사'에서도 얘기했듯이, ‘정장공’은 자신이 없는 틈을 타 반역을 꾀하던 동생, ‘공숙 단’을 처단하고 이에 내응하려 했던 어머니를 '황천에 가기 전에는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


‘정장공’의 어머니 ‘강씨’는 ‘정장공’을 대할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강씨’는 궁중을 떠나 ‘영’ 땅으로 갔다. 그 뒤 ‘정장공’은 鄭城(정성)으로 돌아가 탄식했다.


"내 하는 수 없이 동생을 죽였지만 어찌 모친마저 멀리 여의고 천륜의 죄인이 되었단 말인가!"


이때, ‘영곡’ 땅을 다스리는 지방 관리의 이름은 ‘영고숙’이었다. 그는 위인이 매우 정직해서 사사로운 정으로 매사를 판단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원래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간에 우애 있기로 유명했다.


그는 ‘정장공’이 그 어머니 ‘강씨’를 ‘영’ 땅에다 안치시켰다는 소문을 듣고 탄식했다.


"어미가 어미답지 못할지라도, 자식은 자식의 도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주공의 이번 처사는 敎化(교화)를 상하게 하는구나."


‘영고숙’은 몇 마리의 올빼미를 구해다가 ‘정장공’에게 바쳤다.


"이는 무슨 날짐승인가?"


"이 새는 올빼미라고 합니다. 낮이면 태산도 보지 못하며, 밤이면 능히 추호까지 분별합니다. 곧 조그만 것은 볼 줄 알지만, 큰 것은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올빼미는 어릴 때 어미의 젖을 먹고 일단 장성하면 그 어미를 쪼아 먹기 때문에 세상에선 不孝(불효)한 새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슴지 않고 이 새를 잡아먹습니다."


"..."


‘정장공’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여기에서 ‘영고숙’이 '올빼미를 욕하면서 간접적으로 불효한 처사를 행한 ‘정장공’을 힐난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뽕나무를 가리키며 홰나무를 욕한 것이다.


이후 ‘영고숙’의 간언에 따라 지하에 황천을 만들고 그곳에서 어머니 ‘강씨’를 만나, 함께 정성으로 돌아왔다. 백성들은 정장공이 모친을 모시고 함께 돌아온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이마에 손을 대고 행렬을 바라보면서 찬탄하였다.


"참으로 우리 주공은 효자로다."


그러나 이는 모두 다 ‘영고숙’의 공로였다.


*. 병법적인 의미로의 '지상매괴'는 관용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적의 계략을 간접적 방법으로 무력화 시킨다'라는 의미로 쓰여 왔다고 한다. 하지만 의미가 지나치게 개괄적이고, 확대되어 여기에서는 언급하는 정도로만 넘어가도록 한다.


*. 홰나무는 느티나무를 뜻하는 말이다.



5-3, 제27계 가치부전(假痴不癲) : 어리석은 척하되, 미친 척 하지마라.


이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재능이나 식견을 감추어 상대방으로 하여금 경계심을 품지 않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계략이다. 이도 역사를 둘러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계략 중 하나이다.


“일부러 어리석거나 딴전을 부리는 편이, 아는 척하거나 경거망동하는 것보다 유리하다. 조용히 계략을 가다듬고 실력을 기른다. 이는 우뢰가 가만히 때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寧僞作不知不僞,不僞作假知妄僞;靜不露機,雲雷屯也.]


방연의 시기에 대해 손빈이 미친 척을 해서 제나라로 갔고, 패왕 항우 앞에서 유방이 어리석은 체하다가 뒤통수를 쳤으며, 조조의 서슬 퍼런 태도 앞에서 유비가 어리석은 체하여 조조에게서 도망쳤다. 또한 우리역사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정적들의 경계를 풀기 위해 어리석은 짓을 하고 다니기도 하였다.



예문>


당시 유비는 조조와 함께 여포를 치고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그러고 있던 와중에 동승을 중심으로 하는 조조토벌 모의에 가담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후원으로 나가 채소를 심고 손수 물을 주며 가꾸었다. 관우와 장비가 이에 한탄한다.


"형님께서는 천하대사는 생각지 않으시고 소인(小人)들의 일이나 배워 무엇하시려는 것이옵니까?"


"그것은 너희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관우와 장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조조가 현덕을 불렀다. 현덕이 상부로 올라가 조조를 뵙자 조조가 웃으며 말했다.


"집에서 큰일을 하고 계신다지요?"


현덕은 크게 놀라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동승과의 모의가 들킨 것은 아닌가 생각한 것이다.

조조가 현덕의 손을 잡고 후원으로 나오며 말했다.


"채마밭을 가꾸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닐테지요."


현덕은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그저 심심풀이로 하는 것뿐이옵니다."


조조는 매실이 잘 익어 현덕과 한 잔 하고 싶어 불렀다며, 정자로 안내했다. 한 동이 술을 데워 두 사람이 마주앉아 유쾌하게 마셨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 오를 때였다. 갑자기 비구름이 몰려들며 곧 소나기라도 내릴 기세였다. 저 멀리 龍掛(용괘)가 생겨났다. 조조가 말했다.


"사군은 龍이 어떻게 변하는지 아시오?"


"잘 모르옵니다."


"용은 제 몸을 크게 할수도 있고, 작게 할수도 있으며,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고, 숨어들 수도 있다고 하오. 커지면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하지만, 작아지면 비늘도 감추고 형태조차 나타나지 않으며, 올라가면 우주 속을 날아다니지만 숨어들면 파도 속에 엎드려 때를 기다린다고 하는데, 지금은 바야흐로 깊은 봄이라 용이 변하고 있는 중이오. 사람도 뜻을 이루면 천하를 주름잡으니, 세상의 영웅들도 용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오.

현덕은 오랫동안 사방을 편력하였으니 지금 세상의 영웅이 누구인지 분명히 아실 게요. 누구누구인지 어디 한 번 말씀해 보시오."


이에 유비는 원술, 원소, 유표, 손책, 유장, 장수, 장로, 한수 등의 이름을 차례로 언급하나 조조는 이를 일축한다.


"대저 영웅이란 가슴에 큰 뜻을 품고, 뱃속에 좋은 계책이 있으며, 우주의 기미를 싸 감추고, 천지의 뜻을 삼키거나 뱉는 사람이오."


"누가 그런 사람이옵니까?"


"지금 천하의 영웅은 사군(당신)과 이 조조뿐이외다."


현덕은 그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그때 마친 비가 쏟아지며 천둥소리가 크게 일었다. 현덕은 젓가락을 주우며 말했다.


"웬 천둥이 이리 대단하담."


"장부도 천둥을 무서워하시오?"


"공자께서도 '빠른 천둥과 맹렬한 바람이 일면 반드시 안색이 변하셨다' 했는데 어찌 무섭지 않겠사옵니까?"


현덕은 조조의 말에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린 일을 가볍게 얼버무려 넘겼다. 조조는 현덕의 그릇이 작은 것을 알고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이때, 관우와 장비가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유비가 조조에게 불려갔다는 것을 알고 부랴부랴 달려온 것이다.


이내 술자리가 파하고, 유비 일행은 관사로 돌아왔다. 현덕은 관우와 장비에게 젓가락 떨어뜨린 일을 얘기해 주었다. 관우가 물었다.


"무슨 뜻이옵니까?"


"내가 채소를 가꾼 것은, 조조가 나의 그러한 행동을 보고 큰뜻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고 믿게 하려는 속셈이었는데, 뜻밖에 조조가 나를 영웅이라고 하는 바람에 크게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린 것이다. 또한 다시 조조의 의심을 살까봐 천둥을 핑계로 얼버무렸던 것이다."


관우와 장비가 말했다.


"형님은 참으로 내다보시는 눈이 높사옵니다."


여기에서 유비는 두 번의 '가치부전'을 행한다. 먼저, 채소를 가꾸며 자신에게 웅지가 없음을 가장한 것이요, 둘째 자신의 속내를 들킨 듯 하자 천둥을 핑계 삼아 담이 작은 사내로 보이게 한 것이다.


*. '가치부전'의 의미에 대한 해석에 '어리석은 척하되 미친척하지 말라'고 되어있는 자료도 있으나, '가치부전'의 본질상, 어리석은 척하거나 미친척하거나 상대방의 경계를 푸는 점에서 별반 차이는 없는 것으로 생각되므로 위와 같이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5-4, 제28계 상옥추제(上屋抽梯) : 지붕으로 유인한 뒤 사다리를 치운다.


상대방을 유인해 놓고 퇴로를 완전히 차단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후 상대방에게 자신의 요구를 수용케 하거나, 궤멸시키거나 하는 식의 계략이다.


“상대방을 작은 이익으로 유혹하여 나아가게 하고 퇴로를 차단하여 사지에 빠져들게 한다. 적이 해독을 입는 것은 빠져서는 안 되는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假之以便,唆之使前,斷其援應,陷之死地.遇毒,位不當也.]



예문>


유비는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던 시대였고, 그때 그는 초려를 세 번 방문해서 제갈량을 얻은 상태였다. 하지만 형주는 유표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음모들로 흉흉한 상태였다. 


또한 유비 자신도 유표에게 '장자를 후계자로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가 유표의 후처인 채부인에게 미움을 사, 채모에게 죽을 뻔 한 일도 있었다.


유표는 자신이 죽은 후의 일을 부탁하고자 유비를 불렀다. 유표는 '자신이 죽고 나면 유비가 형주의 주인이 되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비는 이를 정중히 거절하고 물러나왔다. 역관에서 쉬고 있는데 유기가 와서 유비에게 말했다.


"계모(채부인)가 용납하지 않아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옵니다. 바라옵건대 숙부께서는 불쌍히 여겨 구해주소서."


채부인은 자신의 아들인 유종(유표의 작은아들)을 유표의 후계자로 삼기 위해 유비와 유기를 제거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비는 유기에게 그것은 집안일이므로 자신이 어찌할 일이 아니라 했다. 유기가 다시 제갈량에게 물었으나 제갈량의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유비가 유기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내일 내가 공명에게 답방토록 하겠으니 현질은 이렇게 이렇게 하시게. 그러면 계책을 알려줄 걸세."


다음날 유비는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공명에게 유기를 답방케 했다. 차를 마시고 난 후 유기가 말했다.


"저는 계모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한 말씀하여 구해주시면 다행이겠사옵니다."


"저는 손님에 불과한데 어찌 남의 집안일에 대해 말할 수 있겠소이까? 혹 누설되기라도 한다면 그 해가 적지 않을 터이옵니다."


말을 마친 공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유기가 술이라도 하자며 공명을 만류했다. 술을 마시다가 또 유기가 말했다.


"계모가 나를 용납하지 않으니 제발 선생께서 한 말씀하여 나를 구해주소서."


"그것은 제가 감히 도모할 바가 아니옵니다."


말을 마치자 또 작별하고 가려고 하였다.


"말씀을 안 해주시면 그만이지, 어찌 금방 가시려고만 하시옵니까?"


그래서 제갈량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유기가 말했다.


"저에게 古書(고서) 한 권이 있는데, 선생께서 한 번 보아주시오."


그래서 제갈량은 유기를 따라 작은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책은 어디에 있소?"


"계모가 용납하지 않아 저는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오. 선생은 서운하게도 한 말씀도 해주시지 않습니까?"


제갈량은 일어나 다락을 내려가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사다리가 치워진 후였다.


유기가 말했다.


"선생은 누설될까 염려하여 제게 방책을 가르쳐주지 않으셨소이다. 지금 위로는 하늘도 듣지 못하고 아래로는 땅도 듣지 못하오이다. 선생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저의 귀로 들어갈 뿐이니 가르쳐 주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남의 친족은 이간질할 수 없다고 하였소. 내 어찌 공자를 위해 도모할 수 있겠소?"


"선생은 끝내 저에게 가르쳐주지 않겠소이까? 그렇다면 어차피 저는 죽은 목숨이니 선생 앞에서 죽겠소이다!"

유기는 즉시 칼을 뽑아 자신의 목을 찌르려 하였다. 제갈량이 말리며 말했다.


"좋은 방책이 있기는 하오."


"어서 가르쳐 주소서."


"공자는 신생과 중이의 일도 못 들으셨사옵니까? 신생은 안에 있었기 때문에 죽었고, 중이는 밖에 있었기 때문에 무사했소. 지금 황조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강하는 지키는 사람이 없는데 공자는 어찌 강하로 가서 지키겠다고 하지 않으시옵니까? 그렇게 하면 화는 면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에 유기는 두 번 절하며 가르쳐 준 것을 고마워했다. 그리고는 사다리를 다시 가져오게 하여 제갈량을 내려가게 했다.


유기는 제갈량을 다락으로 유인해 사다리를 치워버렸다. 그렇게 해서 제갈량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다. 실제로 '상옥추제'는 여러 가지 의미로 볼 수 있다. 태도가 불분명한 아군을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끌어들여 싸우게 한다거나, 적군을 작은 이익으로 유혹한 후 퇴로를 차단하여 꼼짝도 못하게 하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 ‘신생’과 ‘중이’는 春秋時代, 진헌공의 아들이었던 두 사람은 진헌공의 후실이었던 ‘여희’에 의해 수모를 겪게 된다. ‘신생’은 ‘여희’에 간계에 의해 제거당하고, ‘중이’는 진나라에서 도망쳐서 타국을 전전하게 된다. ‘중이’는 이후 고국을 떠난 지 십 수 년 만에 고국 ‘진나라’로 돌아와 춘추오패의 한 사람이 된다. 그가 바로 ‘晉文公(진문공)’이다.




5-5, 제29계 수상개화(樹上開花) : 나무에 꽃을 피게 한다.


'꽃이 없는 나무 위에 꽃이 핀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의미이다. 쉽게 말해서 '없으면서도 있는척' 하는 것이다.


“형세에 따라 위세를 떨치면, 작은 세력이라도 크게 보일 수 있다. 기러기가 하늘을 날며, 날개를 활짝 펴면 위풍당당하지 않은가.” [借局布勢,力小勢大.鴻漸於陸,其羽可用爲儀也.]


보통 병법들이 '있으면서도 없는 척'을 강조한 것과는 대조된다. 손자병법 등의 병법서에서는 일관적으로 '우리측이 유리해도 열세하게 보이게 하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상대방의 방심을 이끌어 내서 승리를 취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예문>


유비는 형주에 있다가 조조의 군세에 쫓겨 동오로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백성들이 뒤를 다른데다가, 병사도 적어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 신세였다. 또한 조조군의 추격 속에 유비의 식솔들과 장수들도 뿔뿔이 흩어져 있는 상태였다.


장비는 유비군의 후위를 맡아 長坂橋(장판교)에 버티고 섰다. 그의 휘하에 있는 병사는 기병 20여명뿐이었다. 장비는 다리 일대에 숲이 우거져 있는 것을 보고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 냈다. 병사들에게 나뭇가지를 잘라 말꼬리에 매달고 숲속을 달리게 하면서 흙먼지를 일으키게 했다. 그로 인해 복병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장팔사모를 비껴 든 채 다리 위에 멈춰 서서 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빙이 이끄는 조조군이 장판교 어귀에 다다랐다. 장비가 호랑이 수염을 곧추세우고 고리눈을 부릅뜬 채 장팔사모를 뻗쳐들고 다리 위에 말을 세우고 노려보고 있었다. 또한 다리 건너편 숲속에서 흙먼지가 뿌옇게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아 복병이 있지 않을까 의심되었다. 이에 문빙은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잠시 후 조인, 이전, 하후돈, 하후연, 악진, 장료, 장합, 허저 등의 장수들이 모두 도착했다. 이들은 모두 장비가 다리 위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제갈량의 계책이 아닌가 싶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이에 조조가 보고를 받고는 앞으로 달려 나왔다.


이를 보고 장비가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내가 바로 燕人 張翼德(연인 장익덕)이다! 어느 누가 나와 한 판 겨뤄 보겠느냐!"


목소리가 마치 천둥을 치는 듯했다. 그 소리를 듣는 조조의 군사들은 모두 겁에 질렸다. 조조가 급히 좌우를 돌아보고 말했다.


"전에 운장에게 들으니, 익덕은 백만 대군에 둘러싸여 있는 상장(上將)의 목을 식은 죽 먹듯이 벨 수 있다고 하였다. 오늘 만났으니 가벼이 대적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장비가 또다시 외쳤다.


"싸우자 하면, 싸우지도 않고, 물러가라 하면 물러가지도 않으니 도대체 어쩌자는 것이냐!"


장비의 고함소리에 조조의 옆에 있던 하후걸이 놀라 말에서 떨어졌다. 이와 함께 조조군의 모든 병사와 장수들이 일제히 달아났다. 사람은 썰물처럼 빠지고 말들은 산사태가 무너지는 듯 서로가 밟고 밟히었다.


장비의 위용과 숲속에 숨어있을지 모르는 복병 때문에 조조군은 물러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복병이 있는 것처럼 보여 조조로 하여금 판단을 유보하게 하고, 나아가 판단을 그르치게 한 것이 바로 장비의 '수상개화'였던 것이다.


이후 장비는 장판교를 끊고 유비에게 달려가 자신이 한 일을 얘기했다. 유비가 말했다.


"나의 아우가 용감하긴 했지만, 잘못 생각한 것이 애석하다."


장비가 까닭을 묻자, 유비가 대답했다.


"조조는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다. 네가 다리를 끊지 않았다면 그는 매복이 있지 않을까 하여 감히 전진하지 못했겠지만 이제 다리를 끊었으니, 그들은 우리가 겁을 먹고 있고 군사도 없다고 생각하여 반드시 추격해 올 것이다."



5-6, 제30계 반객위주(反客爲主) : 손님이 도리어 주인 노릇하다.


말 그대로 주객을 전도시켜 주도권을 차지한다는 뜻이다. 즉, 수동적 위치에 놓여 있다가 주인의 자리까지 차지해 버리는 것이다.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주도권을 차지한다. 다만 서두르지 않고 점진적으로 성사시킨다.” [乘隙揷足,扼其主機,漸之進也.]


'반객위주'의 달인이라 하면 유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조조에게 몸을 붙이고 있으면서 슬그머니 서주성을 차지했으며, 동오로 피신해서 조조와 손권을 싸움 붙이고 자신은 형주를 슬그머니 차지했고, 장로의 위협에 도움을 청하는 유장에게로 가서 또 슬그머니 촉을 집어삼켜 버렸다.


특히 유비의 入蜀(입촉)은 '反客爲主(반객위주)'의 모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문>


당시 유장은 한중을 차지하고 있는 오두미교의 교조, 장로의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장로에게 항복하자는 의견과 외부의 힘을 빌려 장로를 막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리고 '빌리고자 하는 외부의 힘'으로 물색된 것이 조조와 유비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동족'인 유비의 힘을 빌리기로 한다.


이에 유비는 방통을 군사로 삼아 병사들을 이끌고, 장로가 쳐들어온다는 가맹관으로 가서 주둔하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東吳에서 형주를 빼앗고자 술책을 부려 손부인은 오나라로 돌아갔고, 또한 조조군은 유수로 침범해 왔다는 소식이 제갈량으로부터 전해진다.


그래서 유비는 방통과 상의한다.


"조조가 손권을 이기면 반드시 형주를 빼앗으려 할 것이고, 손권이 이겨도 반드시 형주를 빼앗으려 들 것이니 어떻게 해야 하겠소?"


"주공께서는 걱정 마소서. 공명이 그쪽에 있으니 동오가 감히 형주를 침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주공께서는 유장에게 편지를 보내서 '조조가 손권을 공격하여 손권이 구원을 청하고 있소. 장로는 자신을 지키는 도적일 뿐, 감히 침범해 오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니 나는 이제 형주로 돌아가 손권과 함께 조조를 치려하오. 그러나 군사는 적고 군량은 모자라니 정예병 3,4 만과 군량 10만섬을 도와주시기 바라오' 라고 말씀하소서. 그리고 군마와 군량을 얻게 되면 그때 다시 의논드리겠습니다."


유비의 편지를 받은 유장은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했다. 황권이 유장에게 말했다.


"유비는 사납고 야심찬 호걸이옵니다. 오랫동안 촉에 머물러 두고 보내지 않는 것은 호랑이를 안방에서 키우는 꼴이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군마와 군량을 보낸다면 호랑이에 날개를 달아 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사옵니까?"

이에 유장은 늙고 약한 군사 4천명과 군량 1만섬만을 보내기로 했다.


유장의 답장을 받은 유비는 불같이 노했다.


"나는 너를 위해 적을 막느라 애쓰면서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너는 이제 재물이나 아끼며 이렇게 인색하게 구니 어찌 군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겠느냐!"


즉시 답장을 찢고 큰 소리로 욕을 하며 벌떡 일어섰다. 방통이 계책을 아뢴다.


"저에게 세가지 계책이 있사옵니다. 주공께서는 한가지를 선택하소서."


"어떤 세가지요?"


"지금 즉시 정예병을 골라 뽑아 이틀 길을 하루에 도와 곧장 蜀郡(촉군)을 기습하는 것이 上策(상책)이고, 형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관을 지키고 있는 양회와 고패가 전송하러 나올터이니 그들을 바로 죽이고 관을 빼앗아 성도로 쳐들어 가는 것이 中策(중책)이옵니다. 그리고 백제성으로 물러났다가 형주로 돌아가서 천천히 빼앗을 계획을 세우는 것이 下策(하책)이옵니다. 만일 망설이며 가지 않으셨다가는 멀잖아 큰 곤란이 닥칠 것이옵니다."


"상책은 너무 빠르고 하책은 너무 느리오. 중책이 늦지도 빠르지도 않으니 그것으로 합시다."


이에 촉을 지키기 위해 들어왔던 유비군은 침략군으로 변해 순식간에 촉을 먹어들어가 결국 촉의 수도인 성도마저 함락시켜, 촉을 차지해 버린다. 이야말로 손님으로 촉에 들어가 트집을 잡아 결국엔 촉의 주인자리를 차지해 버린 '反客爲主(반객위주)'의 예라 할 것이다.


*. 유비의 입촉, 이것은 엄연히 계획된 거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유비가 서천(촉)을 지켜준다면 또 모를까 서천을 떠나면서 안 그래도 부족한 서천의 병사와 군량을 내달라니, 유장의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당시 촉의 병사는 10만여명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 3~4만을 내달라니, 미친게 아니고서는 응할리가 없다.


그리고 그것을 트집잡아 촉을 빼앗으려 들다니, 원군을 거절했다고 해서 남의 나라를 빼앗아 버리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유비가 유장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 것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유장을 트집잡기 위한 덫이었음이 분명하다.




6. 패전계(敗戰計):전쟁에서 승기를 바랄 수 없는 경우,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계략들이 모여있다. 마지막 36계를 설명하면서 다시 한 번 언급할 테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앞선 30가지의 계략들을 모두 시도해 보고, 그러고도 승기가 보이지 않을 경우에 쓰는 것이다. 무작정 도망치면서 '36계 줄행랑이 최고다'라는 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6-1, 제31계 미인계(美人計) : 미녀를 이용하여 적을 대한다.

“병력이 강한 적이라면, 장수에게 작용한다. 장수가 지혜로운 자라면, 정서적인 약점을 공략한다. 장수가 약하고 병사들의 사기가 흩어지면, 스스로 붕괴된다. 적의 약점에 편승하여 힘쓴다면, 아군에게 유리하게 전환할 수 있다.”[兵强者,攻其將;將智者,伐其情.將弱兵頹,其勢自萎.利用御寇,順相保也.]"


미인계에 관한 사례는 흔히들 알고 있을 것이다. 고대로부터 하왕조를 멸망으로 몰고 간 말희, 은왕조를 망하게 한 달기, 주왕조를 망조들게 한 포사, 오나라를 망하게 한 서시, 동탁을 죽음으로 몰고 간 초선, 당현종을 죽게 만든 양귀비 등...한 나라가 망하는 역사에 마지막에는 항시 미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지도자들에게 주색을 경계하기 위한 이야기로 많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예문> 또 다른 미인계..


초한쟁패에서 끈질기게 항우에게 시비를 걸어, 결국엔 항우를 물리치고 漢(한)나라를 건국한 고조 유방, 한나라 내부를 어느 정도 정리하고 황제의 위에 오른 후, 흉노족 토벌에 나섰다. 항우와 유방이 중원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는 동안, 흉노족은 묵특 선우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리고는 국경을 수시로 침입해 오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유방은 흉노족의 계략에 말려들어 작은 平城(평성)에서 40만 흉노군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적은 병력으로 성에 틀어박혀 꼼짝없이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진평이 계략을 내놓는다. 진평의 계략은 다음과 같다.


흉노의 장, 묵특은 여색을 아주 밝히는 자이다. 여자를 좋아하면서도 부인에게는 꼼짝을 못하고 잡혀 살았다. 그래서 진평은 화가에게 美人圖(미인도) 한 장을 그리게 하여, 보물과 함께 묵특의 부인에게 가지고 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묵특 선우께서 미인을 좋아한다 하시기에 미인을 바칠 생각인데, 마음에 드실지 몰라 먼저 그림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 그림을 보시고 마음에 드신다면, 곧 본인을 보내드릴 터이니, 대왕께 여쭈어 주십시오."


그러자 묵특의 부인은 유방이 이 그림같이 꽃 같은 미인을 바친다면 묵특의 총애를 잃을까 싶어, 묵특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또한 혹시 유방이 미인을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닌가 싶어 묵특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한나라를 친다고 해도 우리가 한나라에서 살수도 없는 일이니, 군사를 물리는 게 좋을 듯 하옵니다."


이에 묵특 선우는 그 말을 타당이 여겨, 군사를 돌렸다. 유방, 구사일생의 순간이었다. 겨우 살아 돌아온 유방이었으나, 흉노는 여전히 그의 골칫거리였다. 묵특 선우는 대군을 몰고 국경지대에 계속 침입해 왔던 것이다. 이에 유방은 군사를 일으키고자 진평과 유경에게 상의를 했다. 유경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천하를 평정하느라 너무 오랜 세월을 싸워왔습니다. 이제 다시 묵특을 무력으로 정벌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종실의 공주 한사람을 묵특에게 시집보내 화친을 맺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이에 유방은 유경의 계략에 따라 공주를 시집보내고, 매년 조공을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묵특과 화친을 맺게 된다. 묵특은 잠시 침략을 멈추었으나, 국경지대에서 흉노에게로 투항하는 자들은 계속 노략질을 하곤 했다.


진평은 실제 미인도 아닌, 미인도 한 장으로 거짓 미인계를 써서 유방을 살렸고, 유경은 진짜 미인계를 써서 흉노와 화친을 맺은 것이다.


*. '선우'란 흉노의 수장(왕)을 가리키는 말이다.



6-2, 제32계 공성계(空城計) : 빈 성으로 유인해 미궁에 빠뜨린다.


아군측에 승산이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공허한 상태를 보여줌으로써 '뭔가 계략을 숨겨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흔히 '없으면서도 있는척' 하여 적의 오판을 유도하는 반면, '없으면서 더욱 없는척' 하여 적으로 하여금 착각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병력이 적을 때는 일부러 더욱 적은 것으로 보여, 의심 많은 적을 한층 더 의심케 할 수 있다. 병력이 적을 때의 기책으로 효과를 얻는다.” [虛者虛之,疑中生疑,剛柔之際,奇而復奇.]



예문>


때는 ‘齊(제)나라의 환공’이 치세를 이루고, ‘晉(진)’에서는 ‘진헌공’이 다스리고 있을 때였다. 당시 남방의 ‘楚(초)’에서는 ‘초문왕’이 ‘식나라’를 쳐서 ‘식후’의 부인을 자신의 부인으로 삼아, 그 사이에서 ‘웅간’과 ‘웅운’, 두 아들이 있던 때였다.


‘초문왕’은 죽고 큰아들 ‘웅간’이 왕위에 올랐으나 ‘웅간’은 자신보다 재주와 지혜가 뛰어난 동생 ‘웅운’을 경계하여 틈을 보아 죽이려 하고 있었다. 또한 ‘웅운’은 ‘웅운’대로 자신보다 재주가 뒤처지는 형이 왕위에 있는 것이 불만이어서,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터였다.


그렇게 기회를 노리던 ‘웅운’은 사냥터에 나가는 ‘웅간’을 습격하여 죽이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楚成王(초성왕)’이다.


‘초성왕’의 숙부인 ‘자원’은 맹랑한 사람이었다. 형인 ‘초문왕’이 죽은 후부터 ‘초나라’ 왕위를 노리고 있었으며, 또한 ‘초문왕’이 데려온 형수 ‘문부인(식부인)’을 사모하고 있었다. 이에 ‘자원’은 ‘문부인’의 환심을 사고자 ‘초성왕’의 윤허를 받아 ‘鄭(정)’나라로 쳐들어갔다.


‘정’나라는 당시 ‘鄭文公(정문공)’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즉시 백관을 소집하여 상의했다. 의견은 분분하여 화평론, 주전론, 농성론 등이 계속 오갔다. 이에 ‘숙첨’이 말한다.


"세분 말씀이 다 일리가 있으나,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보건데 ‘초군’은 머지않아 물러갈 것입니다."


한참 의논하고 있는데 ‘초군’이 이미 코앞까지 당도했다는 파발이 들어왔다. 이에 ‘숙첨’은 대담무쌍하게 성문을 활짝 열었다. 백성들은 이전과 다름없이 거리를 왕래하며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에 ‘초군’의 선봉인 ‘투어강’은 깜짝 놀라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자원’을 기다렸다.


보고를 받은 ‘자원’이 나아가 살펴보자, ‘투어강’의 보고와는 달리, 성위에는 ‘정나라 ’ 깃발과 무장한 군사들이 숲처럼 늘어서 있었다. ‘자원’이 이를 보고 찬탄한다.


"정나라엔 훌륭한 신하가 세사람 있다더니 그들의 계책은 참으로 측량할 수 없구나. 우선 정나라의 허실부터 탐지한 후에 공격해야겠다."


그러나 다음날, ‘정나라’와 동맹한 ‘제나라’에서 구원 군이 온다는 첩보가 왔다. 이에 ‘자원’은 감히 정성을 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제후가 우리의 돌아갈 길을 끊으면 우리는 앞뒤로 적군 속에 들고 만다. 내 이번에 정나라를 쳐서 정성 대로까지 이르렀을 즉,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는 군사들에게 함매를 물리고 말의 방울들을 모두 떼어버리게 한 후, 조용히 퇴각할 것을 명령했다. 그날 밤, 초군은 소리 없이 정성을 떠났다. 그들은 정군의 추격을 당할까 두려워 군막도 걷지 않고 많은 기를 꽂아둔 채로 달아났다.


이렇게 정나라의 숙첨의 공성계에 의해 초군은 계략이 있을까 두려워 공격을 유보하고 있었고, 그 동안 원군이 도착할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6-2, 제33계 반간계(反間計) : 적의 첩자를 역이용한다.


많은 병법서에서 이용되는 것으로, 딱히 삼십육계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잠시 '孫子兵法(손자병법) 用間(용간)편에 설명된 다섯가지 첩자와 그 중에서 '반간'에 대해서 보도록 하겠다.


1. 因間(인간)'은 적국의 평범한 주민을 첩자로 이용하는 것이다.

2. 內間(내간)'은 적국의 벼슬아치를 포섭하여 첩자로 이용하는 것이다.

3. 反間(반간)'은 적의 첩자를 매수하거나 역이용하는 것이다.

4. 死間(사간)'은 적에게 허위정보를 흘리게 하는 첩자이다.

5. 生間(생간)'은 적국을 정탐한 뒤 살아 돌아와 정보를 보고하는 것이다.


적으로부터 침투한 첩자는 반드시 색출하여, 후한 뇌물로 매수하거나 두터운 대접으로 회유하여 전향시킨 다음에 적에게 되돌려 보낸다. 이렇게 해서 아군이 '반간'으로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반간'을 통하여 적국의 상황을 탐지할 수 있으므로, 적국에 '향간(인간)'과 '내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반간'을 통하여 아군의 정보가 적에게 전달되므로, 이는 '사간'을 적에게 침투시켜 허위정보를 제공하는 셈이 되며, '반간'을 통하여 첩자간의 접선이 가능하므로, '생간'으로 하여금 기일 내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서 돌아가도록 할 수 있게 된다...


...이상이 '孫子兵法(손자병법) 用間(용간)'편에 소개된 '반간'에 관한 설명이다.


“상대방을 스스로 의심하게 한다. 이때 상대방의 사람을 이용하면, 아군의 손실도 없다.” [疑中之疑,比之自內,不自失也.]


손자병법에서의 반간은 '확실히 우리 측으로 회유한 다음 적진에 돌려보내 우리 측 첩자로 이용한다.'는 개념으로 그 체계적인 이용에 관한 것까지 해설되어 있는 반면에, 삼십육계는 단순히 '적의 첩자를 역이용한다.'는 개념만이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거기에 어떠한 회유나 매수 같은 것도 없다.


여기 삼십육계에 소개된 '反間計'에서의 '반간'은 적의 첩자를 회유나 매수 같은 것 없이, 적의 첩자를 역으로 속여서 그를 이용하는 것이다.



예문>


항우에게 기가 질리도록 쫓겨 다니기만 하다가 영양성에 갇혀버린 유방은, 진평에게 책략을 구한다. 이에 진평이 계책을 올렸다. 그것은 바로 楚에 첩자를 들여보내, 항우와 범증, 종리매를 이간질시키는 것이었다. 유방이 이를 승인하여 진평은 첩자를 楚에 보냈다.


그리하여 '범증과 종리매는 수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항우가 논공행상을 제대로 해주지 않아, 불만을 품고 있다. 그래서 한나라와 내통하여 초나라를 무너뜨릴 생각을 갖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항우는 이들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좌우에 이 이간계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진언이 있어, 항우는 의심을 풀었다. 그리고는 한층 더 격렬하게 영양성을 공격했다.


이에 장량과 진평이 계책을 올린다. 이번에는 항우에게 화친을 청하자는 것이었다. 유방이 화친을 청하자, 항우는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래서 사신을 보내 결정사항을 통보하겠다고 말했다. 영양성의 허실을 확인해 보고 나서 판단을 내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항우는 자신의 총희인 우미인의 오라비인 우자기를 사신으로 보낸다.


우자기가 사신으로 오자 장량과 진평은 극진히 우자기를 대접했다. 호화로운 객사에서 온갖 산해진미를 대접하며 이렇게 말을 꺼냈다.


"범증 군사께서는 안녕하시옵니까? 오늘은 무슨 일로 이렇게 귀공을 보내셨소이까?"


이에 우자기가 대답했다.


"나는 범증 군사가 보낸 사람이 아니고, 항왕의 사신이오."


이 말을 듣자 장량과 진평은 크게 놀라며 낯빛을 바꾸고는 우자기에게 말했다.


"그러면 당신은 범증 군사가 보낸 밀사가 아니고, 항왕의 사신이란 말이오?"


그러고는 사람을 불러 우자기를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그 곳은 아주 초라하고 대접도 형편이 없는 곳이었다.


우자기의 보고를 받은 항우는 범증에 대한 의심을 굳히고 범증을 쫓아내고 만다. 진평의 반간계이다. 진평이 우자기를 역으로 이용한 것이 삼십육계의 '반간계'에 가장 근접한 예라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영양성에서 항우군의 포위에 갇혀서 지쳐버린 유방군이 사용한 것이므로 패전계로 분류하기도 용이하고...


흔히 역사서나 역사소설에서도 '반간'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많은 경우가 '사간'과 혼동하고 있다.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진에 투입되어 허위정보를 퍼뜨리는' 첩자를 흔히 '반간'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6-3, 제34계 고육계(苦肉計) : 자신을 희생해 적을 안심시킨다.


의심이 많은 상대방의 신용을 사기 위해 스스로 고통을 감내하는 것을 뜻한다. 역사적으로 거짓투항하기 위하여 스스로 벌을 받거나 하는 식으로 많이 쓰였다.


“사람은 스스로를 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해를 입었다면 이는 가해를 받은 것이다. 이러하므로 거짓을 진실로, 진실을 거짓으로 보여 계략을 성공시킨다.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순수하여야 한다.”

[人不自害,受害必眞.假眞眞假,間以得行.童蒙之吉,願以巽也.]



예문>


조조의 군세와 손오의 군세가 적벽에서 대치하고 있을때, 서로 대군이 대치하고 있는 만큼 소규모의 국지전은 빈번했지만 대규모의 정면전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겉으로는 소강상태에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치열한 신경전 및 첩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규모의 국지전에서 번번히 패한 조조는 채모에게 수군의 훈련을 맡겼고, 오군의 적정을 탐지하고자 주유의 친구였던 장간을 첩자로 보낸다. 주유는 장간이 조조의 첩자로 온 것을 알고는 이를 이용해 채모가 자신들과 내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에 장간이 돌아가 채모가 내통하고 있었다고 보고해, 조조는 채모를 죽인다. 이는 채모가 수군훈련에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주유가 채모를 제거하기 위해 '反間計(반간계)'를 쓴 것이었다.


조조는 채모를 죽인후 주유에게 놀아난 것을 알고는 크게 분개한다. 그리고는 채모의 아우인 채중과 채화를 거짓항복시켜 오군에 침투시키고자 한다. 그래서 채중과 채화는 주유에게 거짓항복하며 아무 죄없이 죽은 형의 복수를 하고 싶다고 했다.이에 주유는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주유는 이들의 항복이 거짓인 줄을 알고 있었다. 채중과 채화는 가족들을 데려오지 않은 것을 보고 이들이 첩자로 온 것을 눈치챈 것이다. 그리고는 이들을 역으로 이용하고자 감녕을 불러서 은밀히 분부한다.


이후 황개가 밤에 주유의 막사를 찾아온다. 그리고는 화계를 진언한다. 이에 주유는 자신의 생각도 마찬가지이지만 거짓항복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고민중이었다고 말한다. 그러자 황개는 자신이 기꺼이 그 역할을 맡고자 했다. 주유가 의심많은 조조를 속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 말하자, 황개는 '苦肉計(고육계)'를 진언한다.


다음날 주유는 장수들이 보는 앞에서 황개를 크게 모욕하고 장형에 처한다. 이에 황개는 곤장 50대를 맞고 물러나왔다. 황개가 자기 막사에 누워있는데 감택이 찾아와 고육계가 아닌가 얘기를 한다. 이에 황개는 속내를 털어놓고 감택에게 가짜 항서를 조조에게 갖다 달라고 부탁한다.


감택이 가짜 항서를 조조에게 바치자, 조조는 의심하며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감택을 죽이려 하였다. 그때 채중과 채화가 보낸 편지가 도착했다. 그 편지는 황개의 수형에 관한 이야기였고, 이에 조조는 의심을 풀고 황개를 받아들이고자 한다.


감택은 황개에게 소식을 전한후, 채중과 채화의 소식을 알고자 감녕에게로 간다. 감녕과 감택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채중과 채화가 들어왔다. 이에 감녕과 감택은 짐짓 주유에게 불만이 가득차, 吳를 배반할 생각이 있는것처럼 연기했다. 그러자 채중과 채화는 이들에게 모반할 뜻이 있는 것으로 여겨, 자신들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네사람은 의기투합하였다.


채중과 채화는 이 이야기를 조조에게 편지로 보냈다. 감택은 감택대로 황개가 청아기를 꽂고 투항하러 갈 것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조조는 두 통의 밀서를 받았지만 의혹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이에 모사들과 상의하는데 장간이 지난 번의 실수를 만회하겠다며 나섰다.


장간이 찾아오자 주유는 크게 화를 내며 상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장간을 작은 암자에 감금하고 감시병을 붙혔다. 이에 장간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누군가 병서를 읽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가 방통이며 주유에게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와 함께 조조에게로 간다.


방통을 맞은 조조는 크게 후대하며 그에게 군략에 관한 조언을 구한다. 이에 방통은 조조군이 수상전에 익숙치 않고, 물도 맞지 않아 크게 고생하고 있음을 간한다. 그러자 조조는 감탄하며 대책을 묻는다. 방통은 배를 쇠사슬로 서로 연결하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면 인마가 육지와 같이 생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조조는 즉시 좌우에 분부하여 배들을 모두 쇠사슬과 널빤지로 연결하였다.


이는 주유가 방통에게 미리 지시해둔 것으로, 화계를 쓸 때 배들이 연결이 되어 있으면 피해가 커지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방통이 배를 연결하는 책략을 펼친 것을 '連環計(연환계)'라 하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는 '제35계 연환계'에서 하도록 하겠다.


이렇게 화공에 대한 준비는 모두 끝났으나 동남풍이 불지 않는 것을 알고 주유는 크게 앓게 된다. 이에 제갈량이 자신이 동남풍을 부르겠다고 말하여 주유를 일으킨다.


그리고 황개는 인화물질을 실은 배를 조조의 선단에 부딪혀 불을 일으키고, 동남풍이 불어 조조의 선단에 퍼져갔다. 조조의 선단은 연환계로 엮여 있어서 분리하지도 못하고 모두 전소되고 말았다.


딱히 고육계에 대한 설명은 더 필요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三國志演義' 상의 적벽대전의 전모를 보면 '反間計(반간계)', '苦肉計(고육계)', '連環計(연환계)' 등이 모두 등장하는 희대의 전략이다.




6-4, 제35계 연환계(連環計) : 여러 가지 계책을 연결시킨다.


“적군의 병력이 강대할 때는 정면으로 맞설 수 없다. 스스로 발목을 잡게 만들어 약하게 한다. 아군에 훌륭한 軍師가 있으면, 하늘의 도움을 얻게 될 것이다.” 

[將多兵眾,不可以敵,使其自累,以殺其勢.在師中吉,承天寵也.]


'연환'이라 함은 여러 개의 고리로 이어진 쇠사슬을 뜻한다. 이 계략의 어원은 북방 기마민족들의 기마전술에서 나온 말이라 한다. 말 두 마리를 쇠사슬로 연결해 나란히 돌진시켜 상대방 말의 발을 걸어 무너뜨리는 전술을 '連環馬(연환마)'라고 했다.



예문>


三國志演義에 보면 '連環計(연환계)'라는 말이 여러 번 등장한다. 

첫째는 왕윤이 초선을 이용한 연환계... 

둘째는 방통이 조조의 선단을 쇠사슬로 연결하게 한 연환계.., 

셋째는 여러 계책을 연결시켜 사용한 것을 뜻하는 연환계이다. 


이 세 가지에 쓰인 연환계의 의미가 각각 다르다.


첫 번째로 쓰인 연환계는 왕윤이 '초선'이라는 쇠사슬로 동탁과 여포의 발목을 묶어 둘 다 망하게 하고자 사용한 계략을 뜻한다. 왕윤은 '초선'을 이용해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해서 둘이 서로 발목을 붙잡게 만들어서, 둘 모두를 망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마치 죄수 둘의 발목을 쇠사슬로 연결해 두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면 될 것이다.


두 번째로 쓰인 연환계는 방통이 적벽대전에 앞서 화계를 성공시키고자, 조조에게로 가서 뱃멀미와 물 때문에 고생하는 조조 군에게 내놓은 계략이다. 방통이 조조에게 건의한 연환계는 배들을 서로 쇠사슬로 연결하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서 배가 흔들리지 않게 하여, 육지와 같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그 진짜 의미는 주유가 화계를 썼을 때, 배들이 흩어져 달아나지 못하게 하여 피해를 증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세 번째로 쓰인 연환계는 <'연환'의 계> 라기 보다는 <'계'의 연환>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여러 계책들을 빈틈없이 엮어서 몰아치는 것으로 이것도 '연환계'라는 용어로 쓰여 왔다.



6-5, 제36계 주위상계(走爲上計) : 때로는 전략상 후퇴도 필요하다.


'삼십육계 줄행랑이 최고다'라고 일컬어지는 계략이 바로 이 '走爲上計(주위상계)'이다. 하지만 흔히들 하는 이 말은 잘못된 표현이다. 삼십육계 중에서도 패전계, 그것도 가장 마지막에 주위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얘기는 바로 앞에 열거된 서른다섯가지의 계략을 모두 시도해 보고, 그러고도 승산이 없으면 최후의 수단으로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목숨을 보존하라는 뜻이지, 처음부터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치라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불리하면 적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다음의 기회를 노린다 하여 잘못이 아니다. 이는 일반적인 용병의 원칙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全師避敵.左次無咎,未失常也.]


싸움에 상대가 되지 않을 때에는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많은 장수들에 이야기인데 도망쳐서 다음을 기약하는 것에 대한 우리에 생각은 많이 다르다. 이런 이유는 우리가 이때까지 배워온 교육 때문이다.


도망쳐서 생(生)을 도모하는 이러한 계략은 흔히 비난을 받는다. 이유는 병가(兵家)가 아닌 유가(儒家)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유가에서는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태도를 훨씬 높이 치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도망치면 비난하다가도, 후에 재기에 성공하고 나면 '진정한 용기'니 어쩌니 하면서 치켜세운 것이 또한 유가이기도 하다. 현실감각이라고는 전혀 없는 유가는 武나 兵, 法을 더럽고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는 끝없이 이들을 비난하고 억압해 왔다.


또한 '文은 武를 다스린다' 하여 실제로 계략을 세우고 싸우는 것은 무관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총대장은 항상 문관이었다. 고려시대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했다'고 하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김부식은 단지 문관출신 총대장으로 있었던 것뿐이다. 실제로 싸운 것은 많은 무관 장수들이었지만, 역사에는 단지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했다'고 되어있을 뿐이다.



출처 : "세미신선의 반도원(蟠桃園)의 꿈..
글쓴이 : 세미신선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