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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와 고갱, 두 거장의 너무 다른 인생

수돌이. 2017. 2. 7. 10:05

[김순응의 미술 아카데미] 김환기와 고갱, 두 거장의 너무 다른 인생

 

유복한 집안에서 구김없이 자란 김환기 vs. 가난과 병마로 점철된 고갱김환기는 ‘고고한 학’, 고갱은 ‘목줄 없는 늑대’로 불려‘그리움’ 담아낸 김환기와 ‘절망’ 속에서 피어난 고갱…인간의 행로 그려낸 두 거장대한민국 최고가 기록과(김환기, 63억 3천만원) 세계 최고가 기록(고갱, 3천 5백억원) 보유

                                                                    김환기 화백의 노란색 전면 점화 ‘12-V-70#172’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약 63억원에 낙찰되며

                                                                 한국미술품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다./서울옥션 제공

김환기(1913-1974)의 작품 ‘12-V-70 #172’ (236x173cm, 1970년)이 지난 11월 27일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63억 3000만 원에 팔렸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그림이다. 누가 팔고 누가 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은 2015년 초에 3억 달러(약 3천 5백억 원)에 팔린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의 ‘너 언제 결혼하니?(Nafea Faa ipoipo?)’ (101x77cm, 1892년)이다. 이 작품을 판 사람은 스위스인으로, 컬렉터이자 소더비 이사였던 스테첼린(Rudolf Staechelin, 63)이다. 이 사람은 할아버지로부터 인상파, 후기인상파 명화 20여 점을 가족 공동명의로 물려받았다.

 

◆ 유복한 집안에서 구김 없이 자란 김환기 vs. 가난과 병마로 점철된 고갱의 삶

김환기는 ‘그저 꿈같은 섬이요, 꿈속 같은 고향’, 아름답고 평화로운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도의 화목하고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다. 보통 사람보다는 머리 하나가 더 크고 호리호리한 그는 두루미(학, 鶴)처럼 고고하고 온화하게 세상을 관조하며, 오로지 예술만을 바라보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화가 이준은 “육척 장신이 성큼 성큼 걸어가는 모습은 학이다. 그에게 나래를 붙여 생각하면 청자 속의 학이 틀림없다.”고 했다. 천성이 낙천적이고 구김이 없었던 그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도 작품에서 품위와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그는 늘 주류에 속해 있었으며 모든 사람이 애정과 존경으로 그를 대했다. 그에게 세상은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고향)’이었다.

 

                                                 1957년 파리 아틀리에에서 김환기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갤러리현대 제공

 

정치부 기자이자 급진 공화주의자였던 고갱의 아버지는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자 파리를 탈출, 신문 창간의 꿈을 품고, 페루의 리마를 향하는 배에 오른다. 고갱의 나이 3살 때였다. 고갱의 아버지는 배 안에서 불의의 사고로 죽는다. 홀로 페루에 떨궈진 고갱의 어머니는 고갱과 그 누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 못할 것이 없었다. 그녀는 고갱이 13살 때 파리로 돌아와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렸다.

고갱의 55년 생애는 가난과 병마와 세상과의 불화로 점철되었다. 미술계에서도 그는 늘 아웃사이더였다. 고갱을 이해하고 아꼈던 드가는 고갱을 ‘목줄 없는 굶주린 늑대’라고 했다.

 

◆ ‘땅딸보’ 고갱, 스승이자 후원자인 에드가 드가 만나다… ‘엘리트’ 김환기는 파리로 향해

김환기는 15세에 서울로 와 중동중학교에 입학하지만, 바로 중퇴하고 일본으로 유학 간다. 도쿄 니시키시로 중학교(20세, 당시에는 중고등학교가 합쳐져 있었음), 동경일본대학 미술부를 졸업하고 1937년(25세)에 서울로 돌아온다. 그는 일제 강점하에서도 거의 매년 전시회를 열만큼 미술에 열중했다.

그는 1948년(36세)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이때 이미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이었고, 서울시 문화위원회 위원이었다. 1953년(41세)에는 홍익대학교 학장이 되었고, 42세의 나이에 대한민국 학술회 회원이 되었다. 그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이렇게 많은 감투를 쓰고도 김환기는 거들먹거리지도, 창작을 게을리하지도 않았다.

 

                                                                      2015년 초, 3억 달러(약 3천 5백억 원)에 팔리며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 된 고갱의 ‘너 언제 결혼하니?’ (1892).

1956년(44세), 김환기는 이런 모든 명성과 기득권을 버리고 파리로 건너간다. “김환기가 예술가로서 자신의 이념과, 화가로서 자신의 위치를 고민하자, 넓은 세상으로 나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것을 권한 이는 그의 아내 김향안이었다.”(박미정, 환기 미술관장) 김환기는 산처기(山妻記)에 “아내는 내가 술을 마시든 게으름을 피우든 아무 소리가 없다… 아내는 미술 감상에 있어서도 아주 제법이다… 나는 생활에 있어서나 그림에 있어서나 아내의 비판을 정직하게 듣는다”고 썼다. 1959년(47세) 귀국한 김환기는 4년만인 1963년(50세), 상파울로 비엔날레 한국대표로 참석했다가 뉴욕으로 가서, 거기서 예술의 꽃을 활짝 피우고 생을 마감한다. (1974년, 61세)

아버지로부터 폭력성과 방랑벽을 물려받은, 160cm의 땅딸막한 고갱은 17세(1865년)에 항해학교에 입학, 23세(1871년)까지 항해사로 세계를 누빈다. 고갱은 법적 후견인인 어머니 친구의 도움으로 파리 증권거래소에서 일하게 되고, 1873년(25세)에는 메테 가트라는 덴마크 여성과 결혼한다. 생활이 안정된 그는 인상파를 중심으로 작품을 수집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상파 화가 카미유 피사로를 스승으로, 뛰어난 그림 실력을 보인 아마추어 화가 고갱은 1879년(31세)에 인상파 전시회에 초대받는다. 피사로와 그의 소개로 만난 에드가 드가는 평생 존경과 우정을 변치 않은, 고갱의 스승이자 후원자였다.

1882(34세)년, 주식시장의 붕괴로 졸지에 실업자가 된 고갱은 화가가 될 것을 결심한다. 1883년(35세), 빈털터리가 된 고갱은 아내와 다섯 자녀를 데리고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파리에서 시골 루앵으로 이사했다. 아내 메테는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6개월 만에 다섯 아이를 데리고 코펜하겐 친정집으로 가버렸다. 뒤따라간 고갱은 처가 식구들의 냉대에 몰려 쫓겨나다시피 파리로 돌아간다.

고갱은 이즈음의 곤경을 스승 피사로에게 “선생님, 어쩌다 제가 이런 곤경에 빠졌을까요. 저는 용기도, 돈도 떨어졌습니다. 다락방으로 올라가 목에다 밧줄을 매야하나, 하는 자괴감이 날마다 엄습해 옵니다. 저의 발목을 잡는 것은 오직 그림뿐입니다”라고 토로했다. 이후 고갱은 객지를 전전하다 1903년(55세), 히바오아 섬에서 횡사할 때까지 가족을 못 본다. 아내와는 가끔 편지를 주고받지만, 내용은 서로의 몰이해에 대한 원망, 돈, 가족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 타히티 오가며 지속한 예술 활동, 파리에선 인정 못 받아…만신창이가 된 고갱

                                                                     타히티섬 파페에떼를 거쳐 마타이에 섬에 정착해

                                                       열세 살의 원주민 테후라와 동거하며 그린 ‘아베 마리아’(1891)의 모습.

고갱은 작업실, 잠자리, 일자리를 찾아 파리에서 퐁타방, 브르타뉴에서 다시 파리를 떠돌다, 1887년(39세) 태평양에 있는 작은 섬 타보가를 찾아 떠난다. 이때 그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파리를 벗어나는 일이오. 가난뱅이에게 파리는 사막과 다를 바가 없거든. 예술가로서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지만, 그래도 사흘을 내리 굶고 지내야 할 때가 있다오. 그렇게 굶으면 몸도 상하지만, 의욕이 달아나요.”라고 썼다.

1891년(43세) 고갱은 다시 두 달여의 항해 끝에 타히티에 이른다. 그는 파리를 떠나면서 기자를 만나 “나는 평화롭게 살기 위해, 문명의 껍질을 벗겨내기 위해 떠나려는 것입니다. 나는 그저 소박한, 아주 소박한 예술을 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에서 나를 새롭게 바꾸고 오직 야성적인 것만을 보고 원주민들이 사는 대로 살면서, 마음에 떠오른 것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전달하겠다는 관심사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타히티 역시 이미 문명에 오염된 식민지였다. 그는 구석구석을 헤맨 끝에, 마타이에아라는 꿈에 그리던 마을을 발견, 원주민의 오두막을 빌려 자리 잡는다.

이곳에서 고갱은 13세의 어여쁜 소녀를 만나 많은 걸작들을 그렸다. 그때의 삶을 고갱은 “나는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행복한 나날이었다. 매일 아침 첫 햇살이 나의 방을 비추었다. 테후라의 환한 얼굴은 주위를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우리 두 사람은 한없이 자연스럽고 소박하게, 마치 에덴동산에 온 것처럼 근처 냇가로 가서 물에 잠기곤 했다”고 썼다. 그러나 가난은 야만의 오두막까지 따라왔다. 고갱은 벌거벗은 테후라의 배를 채워줄만한 능력도 없었다. 굶주림 앞에는 사랑도 속절없다.

1893년(45세), 고갱은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그는 타히티에서 그린 40여 점의 작품으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고갱의 스승이자 후원자였던 피사로와 드가는 그의 작품에 찬탄했으나 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럽에서의 1년은 그를 더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이제는 몸도 만신창이가 되어 진통제로 가눠야 했다. 그는 몽프레에게 “고통이 나의 용기를 앗아 갔네. 특히 밤에는 한숨 못 자고 뜬 눈으로....마음 편하고 자유롭게 여생을 보내면서, 저능아들과의 부질없는 다툼도 끝내려네”라고 썼다.

1895년(47세) 6월 28일 파리 역 리옹 행 개찰구, 고갱은 최후의 여행에 올랐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그는 울고 있었다. 다시 타히티로 돌아왔으나 그는 싸움으로 얻은 골절과 매독, 심장병, 우울증, 알콜 중독 등으로 죽을 때까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다.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그는 자기 예술을 완성했다.

 

                                                 왼쪽 위부터 반시계방향으로 김환기의 초기 서울시대 대표작‘피난열차’(1951),

                                        파리시대 대표작‘항아리와 꽃가지’(1957), 두 번째 서울시대 대표작‘달과 매화와 새’(1959).

◆ 조국 그리워한 김환기, 뉴욕 허드슨강에 묻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김환기는 평생을 한국의 아름다움을 그리는 데 바쳤다. “나는 동양 사람이고 한국 사람이다. 내가 아무리 비약하고 변모한다 해도 내 이상의 것은 할 수 없다. 내 그림은 동양 사람의 그림이요, 한국 사람의 그림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가 그린 것은 한국의 전통문화와 자연이었다. 조선시대의 백자항아리, 고가구를 그리고, 한국의 산과 달과 하늘을 그리고, 매화, 사슴, 학 등을 그렸다. 파리에서도 그는 ‘개인전을 갖기 전까지는 그곳 작가들 그림에 물들까봐 전람회 구경도 안 다니고 자기를 지키느라 매우 애를 썼다’고 고백했다.

김환기의 작품은, 뉴욕시대에 들어 점차 구체적인 대상이 사라지고, 점, 선, 색채 중심의 구성을 바탕으로 한 추상으로 변모해가다, 궁극에는 전면점화(全面點畵)로 발전한다. 그가 큰 캔버스에 빼곡하게 찍은 점은 차가운 추상은 아니다. 그는 “친구의 편지에 이른 아침부터 뻐꾸기가 울어댄다 했다. 뻐꾸기 노래를 생각하며 종일 푸른 점을 찍었다”고 썼다.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강산”하면서 점을 찍었다. 그가 찍은 점은 조국의 자연, 조국의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김환기의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232x172cm, 1970년)는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왔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밤이 깊을수록/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는 죽어서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뉴욕 허드슨 강, 북변 산마루에 묻혔다.

 

                                         파리로 돌아와 심각한 우울증을 겪으며 그려낸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1897).

 

◆ 원주민 위해 투쟁하던 고갱, 그가 사랑한 타히티 야자나무 아래 잠들다

고갱이 찾는 진실은 원시(原始)에 있었다. 그가 표현한 원시를, 그러나, 당대의 문명은 수긍하지 않았다. 고갱은 극작가 스트린드베리에게 전시도록의 서문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스트린드베리는 고민 끝에 거절하는 회신을 보냈다.

“....저는 당신의 그림을 이해할 수도 없고, 좋아할 수도 없습니다....선생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문명의 속박을 혐오하는 야만인입니다. 창조주를 시샘한 나머지 틈나는 대로 자기만의 조그만 창조세계를 만들려 하는 거인족의 운명을 안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남들처럼 하늘을 파랗게 보기 보다는 빨갛게 보기를 원하는, 무엇이든 부정하고 반항하는 사람입니다.“

고갱은 거절하는 편지에 답장을 한다. “...당신의 문명과 저의 야만 사이에 거대한 충돌이 빚어졌던 가 봅니다. 당신은 문명 속에서 고뇌하지만 저는 야만 속에서 생명력을 되찾습니다....문명화한 당신의 관념 속에 있는 이브는 당신이나 우리에게 여성에 대한 혐오를 불러일으키곤 하지요. 하지만 제 작업실에 있는, 당신이 두려움을 느끼는 고대의 이브에게 당신은 언젠가 쓴 웃음을 짓는 대신 빙그레 웃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고갱은 스트린드베리의 글과 자기의 답장을 그대로 도록에 실었다.

고갱은 슈페네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연을 곧이곧대로 베끼지 말게. 예술은 추상이야. 자연 앞에서, 자네가 꿈꾸듯이, 추상을 뽑아내도록 해“라고 썼다. 추상과 구상의 구분이 의미를 잃고, 고갱과 김환기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지점이다. 고갱은 자신의 그림이 추상이라고 했고, 마크 로스코는 자신의 그림에 아무런 식별 가능한 대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추상으로 불리기를 거부했다.

말년에는 하루 중 20시간을 자리에 누워 고통에 몸부림쳤던 고갱은 ”어린 시절부터 불행은 저를 따라다니며 괴롭혔습니다. 행운은 한 번도 저를 찾아온 적이 없고 기쁨 같은 것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한탄했다. 그는 습진을 치료하면서 모아둔 비소로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그는 자살 결심을 재차 확고히 하고서,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39x375cm, 1897)를 유서처럼 그렸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해 ”죽기 전에 내게 남은 모든 힘과 극한상황에서 나오는 고통스런 열정을 모두 쏟아 붓고 순수하고 티 없는 이상을 불어넣었네. 그래서 작품의 미숙함은 사라지고 삶이 솟아올라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지”라고 썼다.

그는 죽음 직전의 한 편지에 폴 베를렌의 시를 인용했다. ”거대한 검은 잠이/내 삶으로 떨어져 내린다./잠들어라, 모든 희망이여./잠들어라, 모든 욕망이여.“

고갱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다. 그는 그림그릴 힘조차 남아 있지 않던 마지막 2-3년을 원주민을 위한 식민당국에 대한 투쟁에 바친다. 그러다 1903년 심장마비로 죽는다. ‘굶주린 늑대’다운 마감이었다. 그는 타히티 히바오아 섬 아투오나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야자나무 아래에 묻혔다.

김환기의 동반자가 ‘그리움’이었다면 고갱의 동반자는 ‘절망’이었다. 두 거장은 마지막 작품으로 인간의 행로(行路)에 대해 묻고 있다.

 

◆ 김순응은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받고, 23년 간 금융업에 종사하다 미술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으로 50세에 미술계에 뛰어들었다. 하나은행 자금본부 본부장을 거쳐 2001년부터 3년 간 서울 옥션 대표로 활동했다. 2005년 케이옥션을 만들어서 국내 미술품경매산업의 눈부신 성장에 기여했으며, 현재는 김순응아트컴퍼니를 만들어 젊은 작가 지원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