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1917년 구미에서 태어났다.
그후 주목할만한 그에 대한 신문기사가 있다.
[만주일보. 1942.
3.24] ‘다까끼 마사오(박정희의 제1차 창씨개명)가 만주군관학교나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에는 나이가 많았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호적을 고쳐서 나이를 낮췄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를 낮췄다고 해서 멀쩡한 조선인이 군관각교/사관학교에 입학하기는 쉽지
않았다....’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滅私奉公)‘
이것은 일왕에게 다까끼 마사오가 혈서를 써서 바친 편지의
내용으로, 그는 일제강점기에 있어서 일본인 조선인 통틀어서 혈서로 편지를 일왕에게 바친 유일무이한 인물이다.
아마도 그는 나이가
많은 문제를 고쳐도 해결되지 않는 조선인이라는 신분상의 문제를 해결하여 일본 군관학교/육군사관학교에 그렇게나 들어가고 싶었나보다.
그리하여 그는 일본 육사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후 괴뢰국가인 만주국의 독립군 토벌 특수부대 장교가 될 수 있었고, 본부에서
독립군 토벌 명령이 하달되면 잠을 자다가 벌떡 일어나며 ‘요오시(일본어로 ’좋다’라는 뜻)‘를 외쳤다는 당시 같은 일본인 부대원들의 전언으로
그들로써는 같은 동족, 그것도 자기 나라를 되찾으려고 목숨까지 버려서 싸우는 독립군을 때려잡은 일에 저렇게 맹목적인 충성을 보이는 다까끼
마사오를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후 창씨 개명을 다시 한다. ‘다까끼 마사오‘라는 이름에서는 조센징의
냄새가 다분히 난다는 이유에서 였다. 그가 바꾼 이름은 ’오카모토 미노루‘!
오카모토 미노루가 누구냐? 유명한 인사의 이름이다.
바로 대한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낭인 두목의 이름이다. 그가 왜 이런 이름으로 바꾸었을까? 그것은 굳이 언설의 형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뮤지컬 ‘명성황후’가 커다란 흥행을 했다. 불행히도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 한 사람이 그분을 시해한 일본낭인 두목이다.
또한 현 대통령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낭인 두목의 딸이라는 사실이다.
그후 광복(1945)이 되고 박정희가 선택한 길은
공산주의였다. 같은 계열의 형을 따라 그는 조선남로당의 군책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남한에서 사로잡혀 동료 200 - 300 여명을
밀고하는 조건으로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그 당시 공산주의자, 빨갱이하면 그대로 총살감이었을 시대임을 미루어볼 때 단군이래 최대의
기회주의자임이 명백하다.
또 6.25가 발발하다 그는 일본 장교 전력으로 인해 육군 소령이 될 수 있었다. 또 그후 불과
3,600 여명으로 일으킨 쿠데타는 장면내각 등의 등신같은 대응, 미국의 협조 등으로 인해 성공할 수 있었다.
그는 국가재건회의
최고의장으로 악어의 눈물을 보이며 대통령이 되지 않겠으며 민주인사에게 정권을 이양하겠노라고 했지만 결국 대통령직선제마저 폐기하고 유신정권까지
만들게 된다.
이미 물동량은 철도로 수송이 가능하여 동서횡단 고속도로가 필요하다고 경부고속도로를 반대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다. 그후 10년 후에는 보수비용이 건설비용을 초과할 정도로 엉망이었고, 건설될 당시 마이카 시대가 열리기
전이라 관광버스들만 지나는 한산한 고속도로였다.
그러나 지금은 경부고속도로가 생김으로써 한국의 물류동맥이 생기고 한강의 기적이
토대를 다질 수 있었다 라고 한다.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또 김대중대통령도 반대했던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함으로써 경제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도 새빨간 거짓말이다. 김대중대통령은 동서의 개발불균형 등의 이유로 동서횡단 고속도로를 건설하자고 했지 경부고속도로, 즉
고속도로건설의 자체를 반대한 게 아니다.
또한 당시는 경부선 등 철도 물류소송량이 이미 충분히 경제적인 물류이동 수요를 감당할
정도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모름지기 정권차원의 대국민세뇌효과가 크게 발생한 탓이다. 각종 방송, 신문들은 하나같이 정권의
시녀역할을 하였고, 그렇지 않으면 폐간되거나 방송을 중단하여야만 하였다. 또한 영화 상영 전에는 태극기에 대한 경례가 있었고, 또 정권홍보방송인
‘대한뉴스’를 시청한 다음에야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정권을 잡은 초반에는 하나같이 경제정책이 실패하였고, 당시 미국의 케네디
정권은 독재정권인 박정희정권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겨서 차관도입을 거부하고, 나아가 다른 나라로부터의 차관도입도 사사건건 방해하였다.
경제개발이 필요했던 박정희는 그런 이유 때문에 서독에 광부 간호사 1만5천명을 파견하고 그들의 월급을 담보로 당시 돈 1억5천만
마르크를 빌려올 수 있었다.
박정희정권이 독재정권만 아니었어도 미국으로부터 바로 많은 자금을 도입할 수 있었을 것이며, 영화
‘국제시장’에서 미화된 ‘광부간호사’ ‘애국심’이란 결합은 애시당초에 독재정권이었기에 불가능했던 것을 말해주는 한 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또 갖은 경제정책을 실패로 인해 외환위기가 오자 그는 색다른 선택을 한다. 바로 한일수교다. 물론 올해는 한일협정이 체결된
지 꼭 50년이 되는 해다.
한일협정 당시 체결된 내용은 지금도 세세히 밝혀진 바가 없으나 공개된 부분들을 토대로 언급하고자
한다.
1. 한.일협정에서 평화선(어족자원보호선) 철폐. 2. 독도문제회피(일본측이 아닌 한국측이 먼저 꺼낸 의제이며,
한국측은 독도폭파까지 제안하다 일본측이 한국민의 분노를 예상하며 회피정도로 마무리 되었다. 이후 각 역대정권들에서 독도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 근거가 된다.) 3. 징용.징병.정신대.원폭 피해자 보상 회피 등(언급 당사자들의 일본법원 손배청구가 제기하는 족족 기각 또는
각하되는 원인이자, 일본법원이 그 근거로 내세우는 것이 한일협정이다.) 4. 징용.징병자 강제 저축금 반환 불청구. 5. 문화재
반환포기. 6. 재일동포 법적 지위 보장포기.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상식적으로 서명할 수 있는 내용일까?
이해불가다.
당시 한국측 대표는 김종필 전 총리로 그는 비밀메모에서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라는 메모까지 남겼다.
이완용이 누구인가? 최고의 친일파다. 펜의 힘이 총보다 강하다고 했다. 이완용은 당대 최고의 문필가였다. 그런 그가 친일파였기에
과연 펜의 힘은 총보다 강했다.
그리고 비밀해제된 미국 CIA기밀문서에서는 일본기업에서 한국측 집권자에게 당시 화폐로 6,600만
불을 제공했다고 밝힌 바 있다.
뇌물은 뇌물대로 받고, 나라를 팔아먹은....
일본은 3년간 점령했던 필리핀에게는
무상 6억달러를 제공하고 국교를 수립했으나, 우리와는 이런 이유로 36년간 온갖 살육.투옥.착취 등을 당하고서도 ‘배상’이라는 이름도 못부치고
‘경제협력자금’이라는 명목으로 겨우 3억달러를 받았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또한 이름조차 거론하기 싫은 이승만정권도 당시
화폐기준 30억달러에 일본과 수교하겠다고 하고 있었으며, 장면 내각은 27억 달러를 수교조건으로 내걸고 있었는데, 박정희 정권은 3억달러에
나라를 판 것이나 다름이 없다.
또 베트남전 당시 먼저 파병제의를 미국에 하여 파병하게 되었으며, 정권차원에서 애국심을 동원한
엄청난 홍보를 하였음에도, 부상자 전사자에 대해서는 법률로 전시상황이 아니므로 전사또는 부상이 아니라는 명목하에 수전노같은 보상금을 지급한 바
있으며, 이 법률은 연평해전까지 이어져 그 전사자들이 쥐꼬리만한 보상을 받게 되는 법률적인 근거가 되었다.
또한 아시다피 채홍사를
두고 200여명의 부녀자 및 처녀들을 성노리개로 삼았다. 어느 나라, 어느 역사에도 결혼한 부녀자를 농락한 예는 많지 않다. 고려시대 원나라에
여자들을 바칠 때 여염집에서는 결혼하면 끌려가지 않아도 되므로, 조혼풍습이 생길 정도였음을 생각해보면 그는 무엇으로 비유할 수도 언급할 수도
없는 욕설이 모자랄 정도의 악인임을 알 수 있다.
또 그가 그후 일으킨 경제개발이라는 것은 그이후 미국의 계산에 의한 것으로,
미국은 그들이 요구하는대로 경제정책을 시행하지 않으면 자금을 제공하지 않거나 압박을 가하였다. 모든 경제개발은 미국의 시나리오였던 셈이다.
대략과 같이 박정희를 살펴 보았다.
그는 과연 역사교과서에 미화되어도 되는 인간인가? 아니 인간인가?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