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가(何如歌)와 단심가(丹心歌)
고려는 몽고와 왜구의 침략으로 국가의 힘이 쇠하여 있었다.
학자이자 충신인 정몽주는 흐트러진 나라의 기강을 정비하여
국가 권력을 다지기위해 노력했다.그는 인재를 등용하고 제도를
정비하여 왕권을 강화하여 국운을 세우고자 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이방원은 고려의 힘이 쇠하여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정도전 등과 함께 아버지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왕조를 열고자 하였다.
이성계는 무관으로 사냥을 좋아했는데 어느 날 사냥을 하다 말에서 떨어졌다.
정몽주는 이성계와 함께 요동지역 정벌에 함께 출정한 적도 있어 가까운 사이였다.
이방원은 문안을 위해 찾아온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서 하여가를 읊었다.
하여가(何如歌)
此亦何如彼亦何如(차역하여피역하여)
城隍堂後垣頹落亦何如(성황당후원퇴락역하여)
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아배약차위불사역하여)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에 답하여 정몽주가 부른 시조는 (단심가)이다.
단심가(丹心歌)
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차신사료사료일백번갱사료)
白骨爲塵土魂魄有無也(백골위진토혼백유무야)
鄕主一片丹心寧有改理歟(향주일편단심유개리여)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의 단심가를 들은 이방원은 절대로 자기편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하고
정몽주가 돌아가는 길인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趙英珪)의 철퇴를
맞고 피를 흘리며 죽었다
그리고 아래의 두 시조는 각각 정몽주의 모친과 이직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정몽주 어머니가 아들이 이성계를 만나러 갈때 다칠세라
걱정하는 어미의 마음에서 지은 시조이다,
밑에 것은 고려가 망하자 고려 유신들은 절의를 지키며 초야에 묻혀
망국의 한과,새 왕조에 가담한 자들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던졌다.
이에 새 왕조에 가담한 이들은 자기 합리화와 정당성을 작품으로
나타낸것이며 이직은 두 왕조를 섬긴 자신을 가마귀'에 비유한 것은
속마저 검은 것은 아니라고 함으로써 자신의 양심은 부끄럽지 않음을
강조한 것이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난 까마귀 흰 빛을 샘낼세라
청강(淸江)에 깨끗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을손 너뿐인가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