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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道 정자기행(4811)-장수 단아정(丹娥亭)

수돌이. 2020. 3. 12. 15:25



南道 정자기행(4811)-장수 단아정(丹娥亭)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에  임진왜란 때 왜장과 함께 남강에 투신한 논개를 기리기 위해 1986년에 생가를 복원하면서 조성한 의암 주논개생가지(義巖朱論介生家址) 내에 단아정(丹娥亭), 연지 모퉁이에 있는 누정이다.

이곳 주촌마을은 의암 주논개가 어릴적 또래들과 노닐었던 곳으로 이곳 입구에 의랑(義娘)의 충절을 표상하기 위하여 의랑루(義娘樓)를 세우고  경내 논개 기념관 주논개비 생가지 최경회비 주 논게 부모 묘 생가지 등을 구성하고 있다. 

원래 생가지는 1986년 대곡저수지 축조로 인해 수몰되었으며 현재의 생가지는 논게 할아버지가 함양군 서상면에서 오십령을 넘어와 서당을 짓고 가르쳤던 곳으로 1997년 부터 4년 간 공사 끝에 조성되었다.

입구 우측에 단아정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정자를 최근에 지었다.

단(丹)은 애국단충(愛國丹忠), 아(娥)는 달 속에 있다는 선녀 항아(姮娥)를 일컬어 의랑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충성 단충(丹忠)과 효행이 항아보다 더 아름다운 논개의 지극한 충성과 효심의 얼을 상징하고 있다. 
 
이 정자  단아정(丹娥亭)이란 현판을 1999년 12대 대통령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쓴 것으로 적고 있어 지어진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논개(論介 1574~1593)는 성은 주씨(朱氏)이고, 본관은 신안(新安:중국)이며,  대곡리 주촌에서 태어나  5세때 부친 훈장 주달문 사망후, 모녀는 한 마을에 사는 숙부 주달무 집에 의탁되고. 숙부는 어린 조카를 김풍헌 집에 민며느리로 보낸다는 약조를 하고 금품을 받아 달아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어머니는 논개를 데리고 친정으로 피했다가 체포되어 장수관아에 수감된다.

6세때 이른봄, 전남 화순 출신 장수현감 최경회(崔慶會, 1532~1593)의 심리로 재판이 열림. 무죄 선고를 받았으나 돌아갈 곳이 없는 모녀는 침방관비로 심부름을 하며 살게 된다.


이후 모녀는 무장현감으로 발령받은 최경회를 따라 관비로 임지로 따라가고  9세때 최경회가 영암군수, 14세때 사도시정으로 갈 때 수행을 하고, 17세 되어 최경회의 후처(부실)이 된다.

최경회가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 화순으로 갈 때 논개는 고향 장수로 와 기다리며 살아간다.

19세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본격화되어 피해가 심해지자 상중임에도 형 최경운(崔慶雲)ㆍ최경장(崔慶長)과 함께 고을 사람들을 설득하여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서 장계면 월강리(月岡里) 깃대봉 아래에 도장골에 창의소(暢義所)를 만들고 의병을 모아 병사를 훈련시키기며 진을 마련했을 때 논개는 의병 훈련시킬 때 최경창을 뒷바라지 한다.

이후 왜적을 격파하는 공을 세우면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제2차 진주성전투 때 논개는 성안에서 전투의 참여하면서 뒷수발을 하였는데,  1593년(선조26) 6월 29일  조선군만이 지키고 있던 진주성(晋州城)을 최경회는 진주성 사수에 앞장서 싸우다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성이 함락시키고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위해 수기(),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바위에 올라 껴안고 적장과 함께 남강(南江)에 투신 순절하면서 남편을 따라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그의 나이 겨우 20세에 불과했다.  논개(論介 1574~1593)의 생존한 기간은 만 19세다. 확실한 근거가 희미하다 해도 최경회(崔慶會, 1532~1593)와 죽은 해는 같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남강 가에 가파른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두 글자가 그 위에 크게 새겨져 있다. 그중에 한몽삼(1598~1662)이 쓴  ‘의암’이라는 글을 새긴 바위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윤두수(尹斗壽) 연보(年譜)에는 "진주성(晋州城)을 일본군이 공격하여 함락을 시켰는데, 이 전투는 임진란 중 가장 치열하였던 전투로서 촉성루에서 적장 게야무라(毛谷村)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였다는 의기 논개(論介)의 전설도 이때의 일이다."했듯이 논개에 대해 처음에는 거의 잘 알려지지 않았다.

승정원일기 영조 2년 병오(1726) 5월 16일(정미)  전남 고흥 출신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1559~1623)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談) 1책(冊)의 내용을 인용한 기사에 구체적으로 이렇게 적고 있다.

 "논개(論介)는 진주의 관기(官妓)이다. 만력(萬曆) 계사년(1593, 선조26)에 김천일이 거느리는 창의군(倡義軍)이 진주성을 거점으로 왜적과 항전하였는데 성이 함락되고 군대가 패하게 되자 백성이 다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자 논개는 곱게 단장하고 화려한 의복을 입은 채 촉석루(矗石樓) 아래 가파른 바위 앞에 서 있었으니, 그 아래는 만 길 낭떠러지로 곧장 강물 속으로 떨어지는 곳이었다. 왜군들이 논개를 보고 기뻐하였으나 모두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는데, 한 왜장이 몸을 빼 곧장 앞으로 나왔다. 논개가 웃으면서 맞이하여 마침내 그 왜장을 껴안고 곧바로 깊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저 관기는 음란한 창기인데도 죽음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고 왜적에게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으니, 그 또한 성군(聖君)의 교화를 입은 존재로서 차마 나라를 배반하고 적을 따르지 않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충성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아, 슬프다......"


후에 다산 정약용이 쓴 진주 의기사기(晉州義妓祠記)에서 논개를 기리기를 "부녀자들의 성품은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 그러나 하품(下品)인 사람은 분독(忿毒)을 이기지 못하여 울적하여 죽고 상품(上品)인 사람은 의로워서 그 몸이 더럽혀지고 욕을 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여 죽는다. 그가 죽었을 때 모두들 절개가 바르다고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자기 혼자 죽는 데 그친다. 창기(娼妓)와 같은 부류는 말할 나위도 없다.

어려서부터 풍류스럽고 음탕한 일과 정(情)을 옮기고 바꾸는 일에 길들여졌으므로, 그들의 성품은 흘러다니고 한군데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 또한 남자들은 모두 남편이라고 생각한다. 부부(夫婦)의 예에서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군신(君臣)의 의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로부터 전쟁터에서 멋대로 미녀(美女)를 약탈한 경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 죽어서 절개를 세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옛날에 왜구(倭寇)가 진주(晉州)를 함락하였을 때 의로운 기생이 있었으니, 그녀는 왜장(倭將)을 꾀어 강 가운데 있는 돌 위에서 마주 춤을 추다가 춤이 한창 무르익어 갈 즈음에 그를 껴안고 못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이곳이 그녀의 의절(義節)을 기리는 사(祠)이다. 아, 어찌 열렬한 현부인이 아니랴. 지금 생각해 볼 때, 왜장 한 명을 죽인 것이 삼장사(三壯士)의 치욕을 씻기에는 부족하다고 하겠으나, 성이 함락되려고 할 때 이웃 고을에서는 병사를 풀어서 구원해 주지 아니하고, 조정에서는 공(功)을 시기하여서 패하기만 고대하였다. 그리하여 견고한 성지(城池)를 적군의 손아귀에 떨어뜨려 충신과 지사의 분노와 한탄이 이 일보다 심한 적이 없었는데, 보잘것없는 한 여자가 적장을 죽여 보국(報國)을 하였으니 군신(君臣)간의 의리가 환히 하늘과 땅 사이에 빛나서, 한 성에서의 패배가 문제되지 아니했다. 이 어찌 통쾌한 일이 아닌가......."라고 적고 있다.  '의로운 기생'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유의 한 대목이다.

조선후기 79세의 긴 생애 동안 영조와 정조라는 뛰어난 두 국왕이 이끈 국정의 중심에서 의미 있는 여러 개혁을 주도했던 번암() 채제공(蔡濟恭 1720 ~ 1799)도 촉석루에 오르고(題矗石樓) 촉석루 옆쪽에 있는 논개의 영정이 걸려 있는 논개(論介)의 사당 의기사(義妓祠)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누각이 너무 높아 시름겨워지려는데 / 飛樓孤絶欲愁生
성 위에선 애절한 피리 소리 들려오네 / 城上哀笳氣不平
사당(義妓祠)에는 미풍 속에 신령이 우뚝 섰고 / 遺廟泠風神鬼立
그림배엔 청명한 날 비단옷이 선명하네 / 畫船晴日綺羅明

또 조선 후기의 문신이요 학자로  정조실록 편찬관을 역임하였으며 호조참의 까지 오른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 1741 영조 17∼1826 순조26)가 촉석루(矗石樓)에 오르고 논개의 충혼을 기리며 이렇게 적고 있다.

임진년에 왜적이 쳐들어와 진주성이 함락되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논개라는 기생이 단장을 화려하게 하고서 남강 가의 절벽 위에 앉아 있었다. 여러 왜놈들이 좋아하여 다투어 다가가려 하자, 논개가 말하였다. “너희들의 상장군이 아니 오면 나는 너희의 청을 거절하겠다.” 왜적의 상장군이 이 말을 듣고 기뻐서 냉큼 달려왔다. 곧 함께 마주 안고 춤을 추다가 마침내 왜장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절벽을 뒹굴어 강에 빠져 죽었다. 상장군을 잃은 왜적이 스스로 궤멸되어 진주성이 수복될 수 있었다. 촉석루는 바로 그때의 그 장소인데, 촉석루 아래 비석을 세워 논개의 충렬과 공적을 기록하였다.
壬辰晉州城陷時,妓名論介者,盛容飾坐於臨江絶壁上。群倭悅而爭赴之,妓曰:“若非而上將來者,吾不從也 ” 於是其上將聞之喜卽來,乃與之對舞,遂抱其腰,轉于絶壁而死。倭旣失上將自潰,晉州得復 樓卽其地也 樓下竪碑,記其忠烈功績

그의 시는 더 절절하게 가슴을 후빈다.

아찔한 촉석루 허공을 찌르는데 / 내 마음 어이하여 이토록 쓸쓸하나
짙푸른 대숲은 만고에 일반이고 / 흐늑흐늑 강물은 밤낮으로 오열하네
矗石危樓倚泬寥 客懷何事劇蕭條 靑靑竹色橫今古 决决江聲咽晝宵

절벽은 마음 있어 천 길로 치솟았고 / 뜬구름은 자취 없어 하늘만 아득하네
우뚝 선 기념비엔 아직 생기가 남아 / 의기의 충혼을 불러올 것 같아라
絶壁有心千仞峙 浮雲無跡一天遙 遺碑屹立猶生氣 義妓忠魂若可招
무명자집 시고 제4책



그리고 촉석루에 오른 정약용은 회고하는 시로 논개를 이렇게 기리고 있다.

오랑캐의 바다를 동으로 바라보며  숱한 세월 흘러 / 붉은 누각 우뚝이  산과 언덕을 베고 있네.
그 옛날 꽃다운 물위론  가인의 춤 추는 모습 비추었고/단청 매긴 기둥엔 길이 장사가 남아 있네. 

전장터로 봄바람 불어  초목을 휘어감고/황성에 밤비 내려  안개 낀 물살에 부딪히네.
지금도 영롱한 영혼이  남아 있는 듯 / 삼경에 촛불 밝히고  강신제를 올리네.

또 전북 장수가 고향이었던 일제강점기 순국지사 매천 황현이 1898년  44세 때 의기 논개의 비석 앞에서(義妓論介碑) 시로 그를 이렇게 기억하며 추모했다.

신내(楓川 장수군 시내 이름)
나루는 냇물이 지금도 향기로깨끗이 세수하고 의낭에게 절을 하네
향초 같은 몸으로 어찌 적장을 죽였을까 / 낭군이 이미 항오에 들게 했기 때문이라
楓川渡口水猶香 濯我須眉拜義娘 蕙質何由能殺賊 藁砧已自使編行

장계의 노인들은 제 고향 출신임을 자랑하고 / 촉석루 단청에는 나라 위한 죽음을 제사하네
생각해 보면 선조 때에는 인물이 많았는지라 / 기적에도 한 줄기 빛이 천추(千秋)에 발하였네
長溪父老誇鄕産 矗石丹靑祭國殤 追想穆陵人物盛 千秋妓籍一輝光 /매천집 제3권


조선 말기의 학자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1873년(고종 10)∼1933)도 촉석루에 들려 논개를 기리고 있다.

삼십 년 세월 동안 거듭해서 왔을 때엔 / 강산은 의구한데 물화(物華)는 간데없네
아리땁다 의기(논개) 사당 앞에 쓰인 글자들은 / 아직도 홀로 빛나 푸른 바위 비추는군
三十年間重到時 江山依舊物華非 可憐義妓祠前字 猶自煌煌照碧磯/암서집 제5권

그는 함안의  논개사(論介祠) 등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전남 화순군 .읍 다지리에 최경회을 모신 사당이  충의사 좌측에  논개의 영정을 모시는 의암영각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 충의사 입구의 최경회 동상)

1846년 (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鄭胄錫)이 장수군 장수면(長水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 비문에는 "矗石義 妓論介生長鄕竪名碑"라고 씌어 있다. 장수군에서는 매년 9월 9일에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논개제전(論介祭典)을 열고 있다.

논개(論介)에 대한  변영로(卞榮魯)의 시는 많은 이들의 가슴에 이미 자리하고 있다.

거룩한 분노(憤怒)는 종교(宗敎)보다도 /불붙는 정열(情熱)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魂)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주논개생가지를 방문한 날 여름 비가 내렸다.

이곳을 뒤로 하고 나오는 길에 근사록(近思錄) 도가(家道)에 한 귀절이 의암 주논개상을 스치고 있었다.

"절개를 잃은 사람을 아내로 맞아들이면 자신이 절개를 잃는 것이 된다. 굶어죽는 것은 매우 사소한 일이고 절개를 잃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다....." 지금도 통하는 말일까?

참고문헌 =고전번역서/고전역
문화.오인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