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에 임진왜란 때 왜장과 함께 남강에 투신한 논개를 기리기 위해 1986년에 생가를
복원하면서 조성한 의암 주논개생가지(義巖朱論介生家址) 내에 단아정(丹娥亭), 연지 모퉁이에 있는 누정이다.
이곳 주촌마을은 의암
주논개가 어릴적 또래들과 노닐었던 곳으로 이곳 입구에 의랑(義娘)의 충절을 표상하기 위하여 의랑루(義娘樓)를 세우고 경내 논개 기념관 주논개비
생가지 최경회비 주 논게 부모 묘 생가지 등을 구성하고 있다.
원래 생가지는 1986년 대곡저수지 축조로 인해 수몰되었으며
현재의 생가지는 논게 할아버지가 함양군 서상면에서 오십령을 넘어와 서당을 짓고 가르쳤던 곳으로 1997년 부터 4년 간 공사 끝에
조성되었다.
입구 우측에 단아정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정자를 최근에 지었다.
단(丹)은 애국단충(愛國丹忠), 아(娥)는
달 속에 있다는 선녀 항아(姮娥)를 일컬어 의랑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충성 단충(丹忠)과 효행이 항아보다 더 아름다운 논개의 지극한
충성과 효심의 얼을 상징하고 있다.
이 정자 단아정(丹娥亭)이란 현판을 1999년 12대 대통령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쓴
것으로 적고 있어 지어진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논개(論介 1574~1593)는 성은 주씨(朱氏)이고, 본관은
신안(新安:중국)이며, 대곡리 주촌에서 태어나 5세때 부친 훈장 주달문 사망후, 모녀는 한 마을에 사는 숙부 주달무 집에 의탁되고. 숙부는
어린 조카를 김풍헌 집에 민며느리로 보낸다는 약조를 하고 금품을 받아 달아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어머니는 논개를 데리고 친정으로 피했다가
체포되어 장수관아에 수감된다.
6세때 이른봄, 전남 화순 출신 장수현감 최경회(崔慶會, 1532~1593)의 심리로 재판이 열림.
무죄 선고를 받았으나 돌아갈 곳이 없는 모녀는 침방관비로 심부름을 하며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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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모녀는 무장현감으로 발령받은 최경회를 따라 관비로 임지로 따라가고
9세때 최경회가 영암군수, 14세때 사도시정으로 갈 때 수행을 하고, 17세 되어 최경회의 후처(부실)이 된다.
최경회가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 화순으로 갈 때 논개는 고향 장수로 와 기다리며 살아간다.
19세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본격화되어
피해가 심해지자 상중임에도 형 최경운(崔慶雲)ㆍ최경장(崔慶長)과 함께 고을 사람들을 설득하여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서 장계면 월강리(月岡里)
깃대봉 아래에 도장골에 창의소(暢義所)를 만들고 의병을 모아 병사를 훈련시키기며 진을 마련했을 때 논개는 의병 훈련시킬 때 최경창을 뒷바라지
한다.
이후 왜적을 격파하는 공을 세우면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제2차 진주성전투 때 논개는 성안에서 전투의 참여하면서
뒷수발을 하였는데, 1593년(선조26) 6월 29일 조선군만이 지키고 있던 진주성(晋州城)을 최경회는 진주성 사수에 앞장서 싸우다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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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함락시키고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위해 수기(首妓),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바위에 올라 껴안고 적장과 함께 남강(南江)에 투신
순절하면서 남편을 따라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그의 나이 겨우 20세에 불과했다. 논개(論介 1574~1593)의 생존한 기간은 만
19세다. 확실한 근거가 희미하다 해도 최경회(崔慶會, 1532~1593)와 죽은 해는 같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남강 가에 가파른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두 글자가 그 위에 크게 새겨져 있다. 그중에 한몽삼(韓夢參
1598~1662)이 쓴 ‘의암’이라는 글을 새긴 바위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윤두수(尹斗壽) 연보(年譜)에는
"진주성(晋州城)을 일본군이 공격하여 함락을 시켰는데, 이 전투는 임진란 중 가장 치열하였던 전투로서 촉성루에서 적장 게야무라(毛谷村)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였다는 의기 논개(論介)의 전설도 이때의 일이다."했듯이 논개에 대해 처음에는 거의 잘 알려지지 않았다.
승정원일기
영조 2년 병오(1726) 5월 16일(정미) 전남 고흥 출신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1559~1623)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談)
1책(冊)의 내용을 인용한 기사에 구체적으로 이렇게 적고 있다.
"논개(論介)는 진주의 관기(官妓)이다. 만력(萬曆)
계사년(1593, 선조26)에 김천일이 거느리는 창의군(倡義軍)이 진주성을 거점으로 왜적과 항전하였는데 성이 함락되고 군대가 패하게 되자 백성이
다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자 논개는 곱게 단장하고 화려한 의복을 입은 채 촉석루(矗石樓) 아래 가파른 바위 앞에 서 있었으니, 그 아래는 만 길
낭떠러지로 곧장 강물 속으로 떨어지는 곳이었다. 왜군들이 논개를 보고 기뻐하였으나 모두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는데, 한 왜장이 몸을 빼 곧장
앞으로 나왔다. 논개가 웃으면서 맞이하여 마침내 그 왜장을 껴안고 곧바로 깊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저 관기는 음란한 창기인데도
죽음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고 왜적에게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으니, 그 또한 성군(聖君)의 교화를 입은 존재로서 차마 나라를 배반하고 적을
따르지 않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충성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아, 슬프다......"
후에 다산 정약용이 쓴 진주
의기사기(晉州義妓祠記)에서 논개를 기리기를 "부녀자들의 성품은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 그러나 하품(下品)인 사람은 분독(忿毒)을 이기지 못하여
울적하여 죽고 상품(上品)인 사람은 의로워서 그 몸이 더럽혀지고 욕을 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여 죽는다. 그가 죽었을 때 모두들 절개가 바르다고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자기 혼자 죽는 데 그친다. 창기(娼妓)와 같은 부류는 말할 나위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