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벽은 붉은 절벽으로 아름답기 그지 없어 그 명승과 경관이 중국의 북송(北宋)
때의 시인 소동파(蘇東坡)의 유명한 적벽부(赤壁賦) 에 나오는 황주 양자강 강가에 있는 적벽을 방불하다 하여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퇴적암 계통
점판암벽의 감입(嵌入)곡류 구간은 비경이 되었다.
그 지은이는 조선조 중종(中宗) 때의 명유(名儒) 인 신재 최산두(新齋 崔山斗)
가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로 동복 연월리에 적거(謫居) 하면서 두루 동복의 산천을 거닐다가 이 승경을 보고 적벽이라 명명(命名)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처음에 이미 초옥삼간인 물염정이 세워져 그후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등이 이 승경을 시로 읊었고,
지금도 많은 시인 묵객(詩人 墨客)들이 찾아와 주옥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적벽은 하도 많은 이가 절경을 품에 담아 갔기에 몇의
음율을 되새기는 것 만으로도 적벽에 멋을 다한다. 적벽에 대해서는 왠만한 실력으로 미사여구가 토하지 안는다. 이미 큰 문인.문객들이 이미 시로
통해 수 백년 전 부터 수 천명이 검증이 끝났다. 그래서 시를 이곳의 풍치를 주마등처럼 달려도 공간이 부족하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문장에도 뛰어났던 임 영(林泳) 1649(인조 27)∼1696(숙종 22)은 적벽을 이렇게 노래했다.
복사꽃은 물결타고 낚시터로 감돌고/ 방초는 무성한데 제비들은 오락가락
나그네 붙드는 주인의 뜻
알겠구려/ 꺾어온 새 고사리 광주리에 가득하네
조선 중기의 문신 이 발(1544.중종 39∼1589.선조 22)도
이곳을 그냥 지나가지 못했다.
방초는 두터워 융단인가 하고/ 청산은 아득하여
연기와 같네
그대와 함께 오늘 취하니/ 만사는 오직 하늘의 뜻이로세
동암은 취해 적벽에 누웠다가/ 어부에게 살찐 고기
얻어오누나
오로지 이것을 어머님께 드려서/ 봄볕같은 그 은혜에 보답하리라
동복천(同福川)의 상류인 창랑천(滄浪川)
유역과 무등산(無等山, 1,187m)에서 발원한 영신천(靈神川)이 합류되어 태고의 절벽을 스치며, 강의 유역에는 크고 작은 수려한
절벽,화순적벽은 동복천 상류인 창랑천에 약 7km에 걸쳐 발달한 크고 작은 수려한 절벽의 경관이 사계절 365일 갖가지 형형색색의 천연그림을
그리며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인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도 "적벽강 정자에서 노닐며(遊赤壁亭子)"시를 읊었다.
해맑은 가을 모래 오솔길이 뻗었는데 / 동문의 푸른산은 구름이 피어날 듯
새벽녘 시냇물엔 연지빛이 잠기었고 / 깨끗한 돌벼랑은 비단무늬 흔들린다
수령의 한가한 놀이 누가 흥취 즐기나 / 시골 사람
무리지어 밭 갈고 낚시하네
사랑홉다 고운 산수 외진 곳에 자리잡아 / 명성 흘려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다오
구름 시내 여러
번 꺾어진 끝에 / 아련히 외론 정자 눈에 들어와
붉은 돌 노을 기운 어리어 있고 /푸른 숲엔 새들이 날아 내리네
옷을 건
바람 난간 훤히 트였고 / 뱃줄 맨 곳 물풀 꽃 향기롭기만
돌아가는 길목에 눈 들어 보니 / 산봉우리 저 위에 별이 하나
둘
노루목(獐項·장항)을 비롯하여 물염·보산·창랑적벽 7km, 389,017㎡가 1982년 전남기념물 제 60호로
지정됐다.이곳은 절경에 맞춰 많은 정자를 지어내고 풍류를 지냈다.
정암수(1534∼1594)가 지은 창랑정(滄浪亭)과 송정순이
건립한 물염정(勿染亭)을 비롯하여 정지준이 세운 망미정(望美亭)과 강선대, 박재만의 만성정, 이언휴의 독락당, 송석정, 적벽정, 환학정,
백학정, 고소대, 탁영정도 있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좌참찬을 지낸 퇴어(退漁) 김진상(金鎭商. 1684(숙종 10)∼1755
영조 31)도 전남 담양군 창평면(昌平面)에 있는 동강정(桐江亭)에서 머물다 적벽을 에 있는 창랑정에서 시주를 즐기며 노래로
품었다.
창랑정 위에서 술이 취해 머물다가/ 아침에야 적벽의 주인 사는 곳을
찾았네
강가에 이르러 적벽부를 읊조리니/ 천고의 신선 자취 한번 가고 없구나
고경명의 ‘적벽의 새벽
안개(赤壁晨霞·적벽신하)’를 읊어본다.
둘러 있는 붉은 층벽 볼수록 아름다운데 / 아침
햇살에 비치는 안개 더욱 좋구나
푸른빛 온 봉우리 비단처럼 붉은데 / 어떤 도인 하염없어 지팡이 짚고 섰네.
또
조선 말기의 학자요 순국지사였던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 ∼1905)은 적벽을 노래했다.
경치 좋은 터 잡아 정자를 지으니/ 아름다운 풍경이여, 모두가 즐겁구나
강물이 잠잠하여 꽃그림자
비치고/ 산조차 고요하니 새소리도 한가롭다
고표(高標) 에는 옛 정취 남아있고/ 그윽하고 조용하여 속세가 아니로다
난간 마루에
기대어 옛정을 생각하니/ 해가 서산에 지도록 돌아갈 길 잊었네
긴 적벽은 동복댐 상류의 장항리에 있는 이서적벽(二西赤壁)과 보산리에 있는
적벽, 창랑리에 있는 적벽, 창랑리 물염마을에 있는 적벽 등이 유명하다. 이서적벽은 다른 말로 노리목적벽이라고도 하는데, 수려한 자연경관과
웅장함 때문에 동복댐의 건설로 수몰되기 전까지는 이곳 적벽의 대표로 꼽혔다.
물염적벽(勿染赤壁)은 규모나 주위의 경치면에서 노리목적벽에는 미치지 못하나 언덕 위에는 송씨(宋氏)라는 사람이 ‘티끌
세상에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세운 물염정(勿染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찾는이가 더 많다. 이 적벽을 두고 소동파 이후 처음으로 북에서 내려 온
선비이며 /임술 년(1841)이 얼마 남지 않은 신축년 가을 일세 東坡以後北路仙 壬戌之餘辛丑秋라고 감흥을 흘렸던 김병연(金炳淵, 김삿갓)이
최후를 마친 절경지로 유명하다. 보산적벽(寶山赤壁)은 규모는 작으나 경치가 아름다웠다.
조선의 학자로
1702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40년 동안에 벼슬은 말단직으로 우관(郵官)을 네 번 지냈던 용포(龍浦) 이유(李濰 1669 현종 10
~ 1742 영조 18) 등의 발길이
이어졌다.
塵路奔忙緫俗情。登玆斗覺愧亭名。淸心賴得江山助。喚起胷中一點明。
官路迎賓若有情。玆亭何以保玆名。元來堅白難磨涅。水色山光自在明
龍浦先生文集卷之一
임진왜란때 선조를 호종 어영대장이 되고 우의정 ·좌의정에 올랐던 문정(文靖) 윤두수(尹斗壽 1533 ~
1601)는 '적벽'이란 시로
며칠 밤 이어진 풍우에 평호가 어두우나, 적벽에서
노니는 일을 어찌 그만두리오.
검은 치마 흰옷은 도사가 변한 학이요. 큰 입 가는 비늘은 송강의 농어로다
하늘은 저물녘
되자 개어서 좋고, 가객은 나를 따라 흥이 외롭지 않네
퉁소 소리 한 곡조에 산 대나무 갈라지니, 소선의 남은 뜻이 지금에
전해지네'하고 읊었다.
이곳은 1970년대 광주시는 인구 50만이 넘어서자 동복수원지를 마련했다.화순 동복면 연월리와
이서면 서리 사이 협곡에 댐이 축조됐다. 이 때문에 굽이돌면서 멋진 경치를 자아냈던 적벽강 30리는 호수로 변했다 그러나 1982년부터
1985년에 걸쳐 지역 주민을 위한 상수도용의 동복댐을 만든 뒤 절벽의 일부가 수몰되어 가까이 볼 수 없게 되었다. 창랑적벽은 도석리의 뒷산을
넘으면 있는데 동쪽의 창랑리에서 바라보면 웅장한 느낌을 준다. 잔잔한 강 위로 화순적벽의 바위 빛이 서로 교차되어 투영되는 광경은 마치 푸른
비단 폭에 동양화를 그려 놓은 것 같다.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김창협(金昌協)의 시문집
농암집(農巖集)에서는
1677년 겨울, 작자가 영암에서 부친을 뵙고 귀향하는 길에 적벽에 들러 지은 시가
농암집(農巖集)에 적벽(赤壁)의 제목으로 전하고 있다.
잇닿은 봉우리들 푸른
하늘 치솟고 그 아래 쪽빛 물결 한 줄기 감아도네
깎아지른 험한 바위 귀신 모습 영락없고 맺혀 서린 산안개 구름 연기 흡사하이
소나무 전나무들 못속에 다 비치었고 해와 달은 그야말로 돌 위에 매달린 듯
높은 비탈 저 위에 둥지 튼 학 있다 하니 깊은 밤
잠자리에 깃옷 신선 꿈을 꾸리
적벽에는 황어굴이라는 물염적벽에 굴이 하나 있는데 이에 대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
거창신씨가 천지의 이치를 터득할 목적으로 이곳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때 신씨의 부인이 장항리 먼길에서 비가오나 눈이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몇년간 밥을 지어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므로 도인이 나타나 시녀를 보내 대신 밥을 지어주기로 하였던바 그뒤 부터는 바위틈에서 한끼
식량이 나와 쌀걱정 밥걱정을 잊고 지냈는데 하루는 친구가 찾아와 쌀을 더 나오도록 할 생각으로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바위틈을 후벼파자 쌀을 나오지
않고 붉은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깜짝놀란 신씨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목욕재계후 참회의 기도를 드렸으나 이후 쌀은
다시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신씨는 정성을 게을리하지 않고 손수 밥을 지어먹으며 경건함으로 지냈는데 산신령이 이를 시험키 위해 여인을 보내자
이 여인을 범하는 죄로인해 신씨는 눈과 귀가 멀어 굴앞 물속에 빠져 죽었다. 신씨가 빠져죽은 곳에는 시체는 간곳없고 다만 황금빛 큰 물고기가
꼬리를 치며 놀고 있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신씨가 죽어 황어가 되었다고 하여 이굴을 황어굴이라 한다고 전한다.
적벽을 바라보며
가득히 부은 호박 빛갈의 술을 마시며 시취에 잠긴 옛선현들의 당시의 호쾌한 기상과 시흥에 취한 풍류를 노래한 시향 글들이 중국 양자강상류에
있는 적벽과 방불하여 칭한 화순적벽의 8경에 대한 고시가 그 모든 감정을 삭히게 한다.
寒山暮鍾 한산사의 저녁 종소리
고소성밖
봉우리에 달 떠오르니 / 두드리는 목어소리 그칠줄 모르네
바람따라 人間世上에 떨어졌으니 다시는 寒山寺 종소리 아니리
月上姑蘇城外峰
木魚亂打送聲重 隨風一落人間世 非復寒山寺裡鍾
金沙落雁 금사에 내리는 기러기 떼
부암사 옆 갈대꽃 언덕에 밝은 모래
十里에 달빛 가득차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찬데 四風이 金氣를 불어 보내니 기러기 가난치 않으리
浮岩寺側蘆花岸 十里明沙月影散
夜靜水寒金氣遊 四風吹送不貧
鶴灘歸帆 학탄에 돌아가는 돗대
喚鶴亭 앞 江에 배돛을 매니/白雪같은 갈대꽃 나그네옷
엄습하네
부평같은 신세 홀로 내왕하며 무양하는데/가냘픈 피리소리 달빛만 처량하구나
喚鶴亭前掛布帆 蘆花如雪客衣점 浮家無恙獨來往
長笛一聲江月纖
仙臺觀射 선대의 활쏘기 놀이
추억해 보면 옛적 滄浪翁이 公退한 후에 / 德을 보려고 時時로 와서 말멍에
풀었네
푸른하늘 우는 화살 날으는 별 같으니 / 오늘날 활 쏘는 재미 옛과 어떠한가
憶昔浪翁公退暇 時來觀德稅仙駕 碧空嚆矢亂飛星
故蹟何如今日射
赤壁落火 적벽의 밤 낙화놀이
南方의 주작 별빛이/ 푸른 하늘을 수 놓은듯 하여라
물위에 어지럽게 날아
고기를 놀리니 / 때로는 성난 고기 배 위에 뛰어 오른다
疑是南方朱雀火 散爲萬點壁空隨 疑心 亂浮水面却欺魚
時見怒鰲跳入구
浮岩觀魚 부암 앞의 고기 구경
바위굴 이끼 위에 앉아 고기를 세니/ 고기가 엄옹하니 가는 물결
이는구나
봄바람 따뜻한 날에 홀로 왕래하니 / 무궁한 즐거움은 호수복상 같구나
岩窟蒼苔坐數魚 浮痕微動엄엄餘 和風暖日獨來往
眞樂不窮濠上如
姑蘇淸風 고소대의 맑은 바람
山 다하고 물 다한곳 赤壁인데/ 東南쪽 들빛은 하늘을 연하였네
화로불 같은
찐더위에 이곳만은 서늘하니 /알겠구나. 姑蘇臺 바람 불어온 것을
赤壁山窮水亦窮 東南野色接天空 洪爐天地獨蕭冷
知是姑蘇臺上風
雪堂明月 설당의 밝은 달빛
사람 그림자 강위 달빛에 나부끼니/뜰앞 오동나무 값 배나 더하리
진흙언덕 위에
東坂에 묻노니/아름다운 신선의 버선을 본 것 같구나
人影婆娑江上月 堂前梧價不曾歇 黃泥坂上問東坂
如見凌波仙子襪
여름에는 송림이 우거져 푸르름과 조화를 이루고 가을에는 붉게 물든 단풍이 어울려 더욱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낸다. 근처의
북면에는 수질이 좋은 화순온천(和順溫泉)이 있어 적벽과 연계해서 관광할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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