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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편수회] 왜군을 동원한 백제 근초고왕의 마한.가야정벌,칠지도

수돌이. 2011. 4. 21. 12:46

 

일본사 편수회 

 

 

[삼국사기]에 <근초고대왕이 한수이남에서 군대사열을 할 때 노란색 깃발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당시 백제는 누구도 넘 볼 수 없는 황제국임을 만방에 선언한 것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백제멸망 후 담로지역인 일본열도로 이주한 백제왕족이 한반도와 인연을 끊고 일본열도 중심으로 편찬한 사서로 일본위주의 기록한 백제멸망이전까지 시기의 백제관련기록은 모두 백제 위주의 내용으로 해석해야 기록의 의미가 바르게 조명될 수 있다.


 


[자료]백제 근초고대왕, 영토확장에 왜군을 용병으로 사용하다
감사의 표시로 제작하여 일본열도 왜왕에게 보낸 칼이 칠지도다!


근초고대왕은 북쪽으로 고구려와 싸워 이기고, 서쪽으로는 요서 방면으로 진출했습니다.
또 남쪽으로는 마한을 굴복시키고, 남동쪽으로는 가야를 제압합니다. 
 

이 밖에 왜국과도 새로운 관계를 맺었습니다. 일본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백제가 369년 마한의 잔여세력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왜의 도움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백제와 왜국 사이에 정식으로 외교 관계가 수립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삼국사기]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이 때 백제 근초고왕은 다섯가지 색깔비단 한 필씩과 쇠뿔로 만든 활, 철궤 40 개를 왜국 사신에게 주었습니다. 또 보물 창고에 있는 진기한 물건들을 보여 주며 백제에 보물이 많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백제가 왜국 사신에게 선물을 하고, 보물을 자랑한것은 왜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백제는 가야연맹의 탁순국으로부터 받은 왜국의 병사를 목라근자 장군으로 하여금 인솔하게 했습니다. 백제 장군의 지휘를 받은 왜국의 병사들은 백제군과 함께 가야지역에 속하는 경상도 남서 지역의 7개 나라를 정벌합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이 땅을 왜국이 백제에게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섬진강 하구의 다사성도 보태 주었다고 합니다. 백제가 왜국에 진기한 물건을 바쳤다고도 되어 있습니다. 과거 일본학자들은 당시 왜국이 정벌한 땅을 백제에게 하사할 만큼 강한 나라였고, 백제는 일본에 조공을 바친 나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일본서기'는 백제멸망 후 일본열도로 이주한 백제인들이 한반도와 인연을 단절하면서 일본열도위주로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일본사학자들이 해석에 있어 헤갈리며 역사날조를 하는 것입니다.

 

기록을 잘 살펴보면 백제의 장군이 왜군을 지휘했을 뿐 아니라, 침미다례도 남만 즉 남쪽 오랑캐라고 했으니, 왜가 아니라 마한에 속하는 남해안 지역들을 공략한 작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왜국은 백제의 정복 활동에 용병을 제공한 것에 불과한 셈이지요. 근초고왕은 왜국의 용병을 고용해 마한의 잔여 세력을 무찌르고 가야도 굴복시켰던 것입니다. 칠지도. 칼날에 새겨진 글은 당시 백제가 왜국보다 상위의 국가임을 보여 줍니다.

 







칠지도. 칼날에 새겨진 기록내용은 백제가 왜국보다 상위의 국가임을 보여 준다

 

칠지도로 본 일본과의 관계

 

일본 텐리시 동쪽에 위치한 이소노카미 신궁에는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칠지도라는 칼이 있었습니다. 현재 나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 칼은 백제에서 만들어 일본에 보낸 것입니다.

 

74.9 ㎝의 곧은 몸 좌우로 가지 모양의 날이 3 개씩 뻗어 나와 있는 모양입니다. 철을 두들겨 만든 칠지도 앞면에는 34 글자가, 뒷면에는 27 글자가 새겨져 있답니다. 글씨가 있는 부분을 금으로 덮어 글자를 돋보이게 만들었지요.

 

이 칼은 1874년 이소노카미 신궁의 스카마사도모라는 사람이 칼에 묻은 녹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글자를 읽어내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칠지도에 새겨진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태화 4년(369년) 5월 16일 병오일 정오에 무쇠를 백 번이나 두들겨서 칠지도를 만든다. 이 칼은 재앙을 피할 수 있다. 마땅히 제후에게 줄 만하다. 앞선 시대 이래로 아무도 이런 신성한 칼을 가진 일이 없는데, 백제왕 치세에 기이하게 이 칼을 얻게 된 성스러운 일이 생겼으므로, 왜왕을 위하여 만든 뜻을 받들어 후세에 길이 전하여 보여라."

 

요약하면 백제의 태자 근구수가 369년에 제후에 해당하는 왜왕에게 특별히 '칠지도'라는 칼을 만들어 하사하니, 잘 보관하여 후세에 전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일본 학자들은 '일본서기'에 '백제가 칠지도를 헌상(임금에게 바침)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백제왕이 왜왕에게 바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칠지도에 새겨진 글은 그들의 주장과는 정반대입니다.

 

백제왕이 제후에 해당하는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부여군 군수리 절터에서도 발견된 바 있는 칠지도는 백제를 상징하는 물건이지요. 백제는 왜국에 칠지도를 내려 주어 왜국을 백제에 협력하는 나라로 삼았던 것입니다. 백제 칠지도는 청동거울과 함께 백제의 제후들에게 주는 상징물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왜국은 백제의 선진 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용병을 제공했습니다. 백제와 왜국의 관계는 이처럼 서로 이익이 되는 방향에서 협력한 것이었지요. 백제는 앞선 기술력을 바탕으로 당시 뒤떨어진 왜국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왜국을 백제의 또 하나의 힘이 되도록 했습니다.

 

 

해양술과 선박술이 뛰어난 마한의 해양세력을 복속함으로써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한 백제는 아시아 해상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고고학 자료]고대 서남해 해양중심지 마한연맹국 -신미(침미다례:해남)제국
 
고대 해남의 중심이었던 백포만은 한·중·일과 교류한 국제해양도시였다. (현산 백방산에서 내려다 본 백포만)
 
 

해남의 역사시대는 언제부터일까. 조선이후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고려이전 해남에 관한 직접 기록은 지리지 외에는 거의 없고 조선초기의 역사마저도 빈약하다.


 

고 해남 땅은 현재의 현산·화산·송지면 일부분 즉 백포만 인근지역이었으며 고려시기에는 감무(하급의 지방관)도 파견되지 않는 영암군 직할의 작은 현이었다.


 

결론으로 고려시기까지 해남의 역사는 암흑기요 선사시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백포만의 역사는 진정한 해남의 토종역사라 할 수 있어 매우 중요하다.


 

두모제방이 막아지기 전 백포만의 중심 물길과 뱃길은 한수내(탄식천)이며 지류는 구산천이고 백방산 아래에 '남포'라는 옛 포구가 있었다.


 

특히 신석기~철기시대를 고고학으로 살펴보면 해남은 땅끝이 아닌 땅머리의 역사이다. 한·중·일 고대뱃길과 관련해 당시 형성된 유적과 유물들을 보면 백포만 일대가 국제해양 도시국가였음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해남땅에 사람이 언제부터 살았을까. 5년 전 산이·화원·문내면에서 발견된 중기 구석기 유물로 해남에 십만여년 전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새롭게 밝혀졌다.


 

당시는 해수면이 현재보다 100여m 낮아 남해와 서해는 모두 중국, 일본과 연결돼 있어 도보여행이 가능했다.


 

그러다가 만여년 전부터 해발고도가 현재와 유사해지면서 해남반도의 백포만도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패총유적은 신석기시대에 처음 등장한다. 그 중 현산면 두모리 마을 일대에 분포하는 패총은 1986년 목포대박물관 약식조사결과 신석기~철기시대에 해당되는, 전남육지부에서는 최초의 것으로 확인 되었다.


 

당시 최고의 귀중품은 무엇이었을까. 황금도 철도 아닌 조개였다. 화폐나 귀중품을 나타내는 한자에 조개(貝)변이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처음의 바다에서 생산된 조개이니 귀할 수밖에, 특히 단단하고 예쁜 조개는 목걸이나 팔찌로 가공돼 천연 다이아몬드와 같이 여성들에게 최고의 선물이었다.


 

귀족의 심벌이기도한 조개팔찌는 군곡패총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이를 찬 유골들이 여수 안도·부산 동삼동 등 우리나라와 일본 각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주목되는 점은 여수 안도패총 출토 여자의 팔뼈에서 다수의 조개팔찌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여러 남성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징표로 즉 '바람녀(?)'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당시는 아빠가 누군 줄 모르는 여성천국 모계사회였음을 감안해 보면 지극히 당연하고 적법했다.


 

철기시대(기원전·후 3C) 패총유적은 송지면(박정·군안·방처·월강·금강·영평·미야·화내·어불도), 현산면(일평·두모), 화산면(안호·흑석)등에 분포돼 있는데 이곳은 백포만 해안을 빙 둘러싸고 있는 옛 포구였다.


 

이 중 송지 군곡리 방처패총은 유일하게 1986~1988년 발굴된 우리나라 철기시대의 대표유적이다. 이곳은 백포만의 동쪽 해안구릉 2만여평에 걸쳐 형성돼 있으며 패각층의 두께는 3m 정도다. 이곳에서는 기원전·후 3세기에 해당되는 각종 유물들이 쏟아졌다.


 

그 중 '화천'은 기원후 8~40년에 중국에서 생산된 청동화이다. 화천의 출토지는 한국의 남부 고대 해로상인 사천·김해·제주 등과 일본의 대마도 일기도 큐슈의 요시노가리 등의 철기시대의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군곡리에서 발견된 화천은 이곳이 한·중·일 고대뱃길에서 중간 기착지였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화천은 장기간 항해 중에 필요한 식량과 물 등을 공급받은 대가로 지불했을 것이다.

또 군곡 패총지에서는 점치는 도구인 복골(점뼈)이 발견됐다. 복골은 사슴이나 멧돼지의 엉덩이뼈를 불로 지져 색깔이나 금이 가는 모습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 원시신앙의 흔적이다.


 

복골은 중국에서 거북 껍질에 동일한 방법으로 했던 의례에서 기인한 중국전통 의례라 할 수 있다.
이런 복골은 흔히 화천과 동반 출토되는데 이는 한·일 모두 같은 양상이다. 군곡리에서는 사슴뼈와 멧돼지뼈가 다량 출토됐다.


 

각종 위험이 도사린 자연항해에서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의례는 필수였는데 대량 발견된 복골은 그 흔적을 알려준다.


 

이외에도 토기류와 방추차, 그물추 그리고 낚시바늘·손칼·도끼·화살촉·낫·송곳 등의 철기류, 칼자루·화살촉·작살촉·찌르게·골침·뒤지게 등의 골각기류, 토제 곱은옥·이빨로 만든 곱은옥·골제뒤꽂이·대롱옥·소옥 장신구류 등 많은 유물이 쏟아졌다.


 

군곡리 패총에서 발견된 유물은 한국 남해안지역과 일본 큐슈를 중심으로 한 한일문화가 활발히 교류했음을 알게 해준다.


 

백포만 패총유적들은 철기시대의 특징과 마한시대 소국문화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중국 진(晋)나라의 진수(陳壽 232~297년)가 쓴 '삼국지 위지 동이전' 마한조에는 54국의 각각 이름이 거명되면서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산다. 진한과 변한과는 달리 마한인은 우·마(牛馬)를 탈 줄 모르며 오직 제사에 쓴다. 옥은 소중히 여기나 금·은을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땅을 파고 지은 집은 마치 무덤과 같고 입구는 위에 있다'는 기록은 모두 군곡패총의 발굴 결과와 일치한다.

게다가 마한족은 기마민족이 아니고 포구의 해양세력임을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한국의 '삼국사기 1145' 중국의 '후한서'삼국지 '진서'와 일본의 '서기'의 마한관련 기록을 종합 정리하면 마한은 마한왕으로부터 백리땅을 얻어 54소국의 하나로 출발한 백제 온조왕 시기에 목지국과 충청·전북까지 점령당했다. 그러나 영산강유역은 4C 말까지 여전히 마한 20여 소국으로 남아있었다. 그 소국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우리나라의 기록은 전무하나 불행 중 다행으로 중국과 일본의 옛 기록에 미미한 흔적이 있다.

중국 '진서' 동이열전 마한조에 '마한의 여러소국이 진(晋) 왕조(277년~290년 사이)에 10여 차례 걸쳐 사신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진서' 282년 기록에 '신미제국(新彌諸國)'은 산을 등지고 바다와 접해있으며 유주(북경의 동북지역)로부터 4000여리인데 20여국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에서 '신미제국'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 720년'의 신공왕후 49년(369)과 응신천황 7년(395)기록에는 '침미다례'라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그 내용은 차후에 언급하기로 하고 지명부터 따져보자. 우선 '신미'와 '침미'는 한자표기상의 차이일 뿐이며, 다례(달=땅의 옛말)는 제국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도 동일의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신미제국은 어디일까. 영산강 일대로 보는데 별 이견이 없으며 다만 그 중심지가 어디냐 하는 것이 쟁점이다. 이도학(전통문화학교), 강봉룡(목포대)교수는 해남 백포만 일대라는 견해를 제시한바 있다. 근거는 당시 고고유적과 해남현의 옛 지명인 '침명현'(신라 경덕왕)은 '침미'와 발음의 유사성 그리고 지리적으로 고대뱃길의 중요 처에 있다는 점을 감안 한 것이다.더욱 패총·성곽·옹관유적 등이 모판 붓듯 한 곳에 있는 것은 예사롭지 않아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서복은 '서불(徐市)'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산둥반도의 제나라 출신 도사로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을 둘러먹은 대단한 사기꾼이다. 불로장생 신선사상에 매료된 진시황에게 불로초 탐사를 제안했다. "바다 가운데 봉래, 방장, 영주 세 신산이 있는데, 그 곳의 신선들이 먹는 불로초를 구해오겠습니다" (수은을 불로장생약이라고 먹고 있던 시황제는 눈이 번쩍했다.)라고 하자 쾌히 허락하고 동남동녀 3천과 함께 서복을 바다 건너로 보냈다.


 

이는 사마천(BC145~BC86)의 '사기' 기록으로 서복의 불로초 사기극은 이렇게 시작됐다. 기원전 219년 산둥반도 동쪽 끝 천진두 낭야대 바닷가에서 드디어 출항했다.


 

서복의 유언에 따라 후손들은 사기극 피해를 볼까봐 다른 지역으로 이사 또는 성씨를 바꾸었다고 한다. 이를 끝으로 '사기' 기록에서 사라진 서복은 어디로 갔을까.


 

한·일 설화를 살펴보면 서복 일행 선단은 한반도의 서해안을 돌아 남해군 상주면 두모포에 상륙하여 금산에 올라 바위에 서불과차(서복이 지나가다)를 새긴 후 부산·제주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이를 뒷받침 해주는 설화가 큐슈지역의 사가 후쿠오카 등 십수 곳에 전한다.


 

일본에서는 의학·학문·농경의 신 등으로 모셔지고 있다. 서복일행은 우리에게도 철기의 선진문화를 전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당시 뱃길에서 험난한 명량해협을 지나 마로해협도 꼭 지나야한다. 그 끝단에 있는 백포만 각처에 국제항구들이 발달해 있었다.


 

군곡리 중국관련 유물들로 보아 장거리 항해시 필요한 물·식량 등을 공급받고 복골로 무사항해를 점쳤을 것으로 상상해 볼 수 있겠다.


 

4~5C 무렵이 되면 백포만 세력은 군안골 주변에서 보다 안쪽인 한수내의 현산 일평리와 구산천의 황산 주변으로 이동, 가야와 교류한다.


 

그리고 5C 말 무렵이면 백제 또는 왜 세력이 백포만에 들어와 조산고분을 조성한다. 이때 해남지역에 최초로 마구가 등장한다.


 

이때 축성한 성곽으로 백방산성과 고다산성, 읍호리성, 일평성지, 고현성지가 있으며 이들 성지는 한수내의 남포로 침입하는 적을 좌우에서 방어했다. 이러한 유적들은 백제·왜간 해양을 통한 활발한 교류와 무관하지 않다.

 

2천여년 전의 타임캡슐 백포만의 패총들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백포만의 국제해양폴리스(도시국가)는 우리 앞에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군곡 패총 출토된 점치는 도구인  복골.  
 















   
 
  일본 큐슈 요시노가리 출토 팔뼈의 조개팔찌.  
 















   
 
  송지 미야리 출토 초기 옹관묘.  
 















   
 
  고대에 해남땅은 화산·현산·송지 일부분, 즉 백포만 인근지역이었다.
(이번 조사에서 새롭게 발견된 송지 박정마을 패총유적지)
 
 












   
 
  송지 군곡 패총서 발견된 중국 돈인 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