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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천년 사직을 마감한 비운의 경순왕(릉)을 찾아서

수돌이. 2011. 1. 11. 18:41

신라 천년 사직을 마감한 비운의 경순왕(릉)을 찾아서
 글 쓴 이 : 權奇模 
*약18년전의 "풍수답사기"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새삼스러워 올립니다.

「신라 천년 사직을 마감한 비운의 경순왕(릉)」

겨울 바람이 밤새 울어재킨 새벽 나절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이런 날은 아무데도 가지 말고 그저 하루종일 방구들이나 지고 누웠으면 하지만 그랬다가는 아무 짓도 못하게 된다. 이럴 때일수록 훌훌 털고 벌떡 일어나 떠나야 한다.

신라 천년 사직을 마감한 비운의 경순왕(릉)을 찾아나선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의 서부전선 군사 분계선 근방.―미리 연락이 되었음에도 출입승인이 지체되는 것은 언듯보기엔 고요와 적막감만이 감돌뿐인 이곳이 역시「전선」임을 실감케 한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갓 결혼한 처,자식들을 뒤로한 채 며칠 후면 반드시 돌아오겠노라고 철석같이 약속한 것이겠건만 이젠 허연 서리가 내린 백발이 되어 가슴속에 떨어지던 눈물마저 말라버린 이산가족의 설움과 한! 통일이여, 평화통일이여,두동강난 민족의 허리는 언제나 이어지려나.......!

이곳 서부전선 연천의 고랑포리는 고려 태조 왕건에게 신라 천년 사직(서기전 57년~서기935년;992년간)을 고스란히 넘겨준 신라 56대 마지막 비운의 임금인「경순왕(릉)」이 외로이 자리한 곳이다.

다른 선대 왕(릉)들이 경주를 벗어남이 없는데 반해 경순왕(릉)이 고려수도 송학(개성)의 근방인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선「경순왕」에 대하여 개략 살펴보면 경순왕은 성은 경주 김씨요 이름은 “부(傅)”이며 시호가「경순」이다.
경애왕이 견훤에 의하여 죽자 역시 견휜에 의하여 옹립되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물려줄 때까지 (927-935년) 9년동안 재위하였으며 978년(고려 경종3년)에 죽었다.

경순왕은 두말 할것도 없이 신라3성인 박.석.김씨중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후손으로 왕건의 맏딸 낙랑공주를 후비로 맞았으며 아들 아홉중 장자(마의 태자)와 차자는 왕위에 있던 때의 죽방부인의 소생이며 나머지 7자는 고려에 귀순한 뒤의 낙랑공주의 소생이다.

장자(마의 태자)는 후손이 없고 차자는 나주 김씨,3자,4자는 경주 김씨 5자는 의성 김씨,6자는 강릉 김씨,7자는 언양 김씨,8자는 삼척 김씨,9자는 울산 김씨로 각기 분종 되었으며 그 후손으로 다시 전주 김씨, 안산 김씨, 도강 김씨,양근 김씨,영천 김씨 등이 있다.

참고로 경주 김씨 계의 본관으로 안동.의성.강릉.선산.언양.상산.나주.울산.김녕.안노.수원.광산.연안.청풍.고령.순천.청도.서흥등의 수십 본이 있다.

삼국유사(제2권 기이 제2)에 기록된 「경순왕」에 관한 내용을 발췌하면 천성2년(후당 명종의 연호) 정해 11월에 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였는데, 경애왕과 비빈 및 종척이 포석정에 놀이를 가서 연회를 즐기느라 적병이 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창졸 간에 어쩔 줄 모르고 왕과 비는 후궁으로 도망해 들어가고 종척과 공경대부와 시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적에게 사로잡히자 노비가 될 것을 애원했다.

견훤이 군사를 풀어 공사간의 재물을 노략질하고 왕궁으로 들어가 거처하면서 경애 왕을 찾도록 해서 왕과 왕비 및 빈첩 여럿이 후궁에 숨어 있다가 붙잡혀 군중으로 끌려 나오니 왕을 핍박하여 자진하게 하고 왕비를 겁탈한 후 부하들을 풀어 빈첩들을 겁탈케 했다.그리고 왕의 족제(族弟)인 “부(傅)”를 왕으로 세우니 그가 비운의 「경순왕」이다.

우리 나라의 전통신앙「신」들은 억울하게 죽은사람이 원한을 가지고 탄생한 신들이 많다. 경순왕,공민왕,최영장군,매월당 김시습,임경업 장군, 단종의 송씨 부인 등이다.

공민왕은 총신에게 살해당한 한 많은 임금이며, 최영 장군은 고려사직을 지키려다가 살해당한 장군이고 모함으로 약관에 형살 당한 남이장군, 세조 쿠데타로 한많은 여생을 산 단종비 송씨부인,세조에 저항하여 평생을 미친 척하고 방황한 김시습,그리고 신라 천년사직을 고스란히 고려에 넘겨준 경순왕 등은 모두가 민중의 공감을 집결시킨 원한의 신(神)들이다.

특히,그 역사가 가장 긴 경순왕은 고려때 부터 신앙되어 왔으며 경순왕의 이름인「김부대왕」으로도 알려져있고 신당은 왕의 피난지로 알려진 충주,제천,원주지방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용화산 학수암에 경순왕 원당 (願堂)이 있고 백운산 황산사와 태고사에도 영당이 있다.그리고 승주송광사,문경 양산사,경주 황남전에도 불교와 습합하여 영전이 모셔져 있고,경주 불국사에는 경순왕이 신었던 것으로 구전되는 신발 한 켤레가 신앙의 대상이 돼있다.

신라가 망할 때 그의 눈앞에서 왕족과 신하, 궁녀들이 살해되고 강간당하며 변방에서는 차례로 이반(離反)하여 고립무원이 된 경순왕― 항복을 거부한 마의 태자는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버리고, 신라 유민들의 원한으로 신위(神位)로 승화 된 것인가......

경순왕이 죽은지 1031년, 두동강난 국토의 허리 서부전선 철책 선에서 원신이 되어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를 던져 주고 있는 경순왕!왕릉에 약간의 제물과 절을 올리고 국태민안을 빌어본다.



※―경순왕릉;나말 여초의 고분과 풍수적 관점

가.신라고분의 특징
1)신라의 장묘법은 풍장(風葬), 이차장(二次葬), 빈묘장(殯墓葬), 화장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불교의 영향을 받아 화장을 한 경우가 많았다. 왕실에 있어서도 효성왕, 진성여왕, 효공왕, 신덕왕, 경명왕등이 화장을 해서 그 뼈를 뿌리든지 매장하는 방법으로 처리했다.

2)신라 고분은 옛 도읍인 경주 부근에 있는 것이 수없이 많다.(무려 수만기라고도 함) 기타 대구, 양산, 울산지방에도 주목 할 것이 많다.

3)일반적으로 신라 고분을 시대와 문화 발달에 따라
가)분구(墳丘)뿐 인 것으로 신라 상대에 해당되며, 완전한 원분(圓墳)으로 배치 되었고
나)분구에 호석(護石)을 설치하고 때로는 거기에다 석란(石欄)을 곁들여서 전면에 석상(石床)을 배치 한 것은 신라 중대의 것으로 태종 무열왕릉 문무왕릉등이 있다.
다)그 외에도 화표(華表), 비각, 문무석인 돌사자를 배치한것-이는 경주군 강서면 흥덕왕릉이 대표적인 예로 이미 당나라의 풍수 장법이 들어와 길지를 찾아 고려,조선능묘 의 표준이 되었다. 그 위치는 산 중복(中腹)에 남면으로 변해있고 뒤에는 산봉우리를 업고 앞은 평야에 임하며, 지봉(支峯)의 좌우는 서로 마주 대하면서 앞을 바라보는 용호(龍虎)의 세(勢)를 이루고 있다.

나.고려고분의 특징
1)고려의 장법은 화장과 별장(別葬)이 일반화되었고 화장을 하여 매장을 하는 것이나, 지기(地氣)의 독점을 위하여 별장을 하는 것은 당시의 풍수지리에 의한 것이다.
2)고려 시대왕릉은 주로 고려조의 도성이었던 개성부근에 있으며 장단, 강화 등에 산재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 고분이라고 칭하여 지는 것은 각지에 산재한다.
3)고려의 왕릉은 일반적으로 구산(邱山)의 언덕 아래쪽의 남향이며 좌(동쪽)에 청룡, 우(서쪽)에 백호를 이루는 언덕이 있고 후방에 주산이 있고 백호는 능의 전방으로 우회하며 주수는 능 우측의 시내에서 능앞을 흐르는 지세이다. 이러한 지형은 신라말부터 조선조에 이르는 시대에 풍수지리상 묘지로서 길상지로 인정된 곳이다.
4)이와같은 형세의 묘는 고려현능, 정릉,안릉, 태릉, 선릉, 성릉, 영릉, 지릉, 홍릉, 고릉, 현정왕릉등이다.
5)능역의 구조는 폭이 10칸 내외이고 길이 20칸(間)내외인 장방형의 땅을 구획해서 좌.우.후방의 3방에 석장을 둘러서 그 구역을 안은 4단면(壇面)으로 하고 각 단면의 전방에서 벽을 축조해서 토류(土留)하고 돌계단으로 각 단면을 연결해서 가장 높고 가장 깊숙한 단(壇)에 능을 둔다. 봉토의 모양은 반구형(半球形)을 이루고 석병(돌담)으로그 자락을 싸고 그 주위에 석난간을 석수(동물모양돌)로 배치하여 정면에 장방형의 석상(石床)을 두고 좌우에 망주석을 세운다. 제2단의 정면에는 장명등(長明燈)을 두고 좌우에 문인석은 대립케하고 제4단에는 서로가 약간 넓으며 여기에 정자각이 있다.(제2단과 제3단은 동일 단면을 이루는 간략한 것도 있다)정자각 앞은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언덕 아래 도지까지 돌계단으로 연결하며 정자각 좌측(향해서 우측)에 능비를 세운다. 또한 능에는 많은 경우 잔디를 심으며 봉토 주위를 두른 방석은 십이면으로 되어 있으며 십이지로 나누어진 방위신 상을 새긴 것이 많다.

다.경순왕릉의 형태
1)경순왕릉 형태
2)위치;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00사단 군사 분계선 근접 군부대내)
3)문화재 지정;사적 제244호
4)지정면적; 3,696㎡(약1,232평)
5)무덤의 지름; 7m(원형봉분)
6)무덤의높이;약 3m(반구형)
7)전순에 계단식이 아닌 잔디심음-고려시대 왕능에 혼용
8)봉토 밑둘레 병석(屛石)설치-봉토 보호를 위하여 설치되며 보통 십이면으로 되어 있 으며 각 면에는 십이지로 나누어진 방위신상(方位神像)을 새긴 것이 많다.
9)곡장(曲墻)설치-고려 이후 왕릉에 설치, 석난간이라고도 함
10)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2기 설치
11)비석;전면→新羅敬順王之墓
후면→생략(사진) ※1747년 (영조 23년) 세움
12)묘지 형태적 평가;전형적 고려고분

라.경순왕릉의 지형과지세
1)경순왕릉은 신라 왕릉들이 경주지역을 벗어남이 없는데 반해 송악(개성)근처인 경기 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 위치한다.
2)고려 왕릉과 형태, 지형에 있어서 별차이가 없으므로 전형적인 고려 초기의 왕릉으로 고려 왕실, 신라 왕실과의 밀접한 관계, 정치적 상황을 엿볼 수 있다.
3)특히 고려 왕릉은 초기에 우백호가 능의 전방을 돌며 우백호 강세를 취하는 것은 땅 에지기가 있다는 풍수지리를 믿었기, 때문에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연관 지을 수 있다.
4)곡장(석난간) 설치를 비롯한 구조 및 형태로 봐서 왕릉의 예우로 설치 했음을 알 수 있다.
5)신라 왕릉이 대부분 평토 봉분하였으나 고려 왕릉은 산 중턱에 지세를 따라 썼다.
6)답사지의 어수선한 분위기,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엄습하지 않은 남향받이 양지 바 른 곳이었다. 어쩌면 길 가던 사람이 쉬었다 가거나 농부나 나뭇군이 쉴 곳으로도 좋 고 겨울 야외 교육장으로 적합한 안온함같은 것을 느꼈다.
7)대부분의 군부대 터가 목숨을 걸어놓고 싸우는 가장 안전한 곳이다. 흔히들 좋은터는 군부대 터라고 한다. 아주 틀린말은 아닌 것 같다.
8)고려 왕릉의 특징; 2,가.나. 나말여초 고분의 특징 참조
9)지형적 평가도; 완벽한 고려고분

※참고사항
1.다음에 기술하는 사항은 어디까지나 개인적 의견이며 발복풍수의 술법적 의도가 아님을 밝혀둔다. 필자와 의견이 다르더라도 책임이 없으며 필자가 잘못 이해 할 수도 있고 답사지의 여러 가지 제한적 여건으로 파악이 되지 않은 부분도 있다.
2.왕릉의 이해(감정)
①형국;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금계는 천계(天鷄)인데 이 천계가 한 밤중에 우선 새벽을 알린후에 지상의 닭이 따라서 운다. 고로 이 금계형은 상길(上吉), 따라서 닭은 한 번 알을 품으면 이십여 마리의 병아리를 부화시키기 때문에 이 형도 역시 대길(大吉), 따라서 이 지형의 소응은 무리를 이끄는 위대한 호걸 및 대대로 많은 자손이 번식한다.
②혈좌;계축혈 남향판
③사상;유혈(여자 젖같은 혈)당판
④주산;금형체
⑤조산;파평산 외
⑥안산;백호 위안 및 수구 독산 금산체
⑦청룡;백호보다는 아주 약해 보인다.
⑧백호;백호작국(좌회우포)
※청룡,백호 잘 싸임
⑨파구;오(午)파
⑩전순;전(방석)
⑪당판;상팔하합, 당판둘레 돌줄
⑫입수;속기입수
⑬평가;혈(穴)→찾기힘든 명당판(개인적 평가)